"본능은 억압받을 뿐인데, 왜 있는 것인가"
태평씨에게는 하루가 길다. 일상적인 것들이 일상적으로 전개되는 삶은 무척이나 단조롭게 느껴지고, 지겹다. 지루함을 느끼면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법이다. 태평씨는 가끔 혼란스럽고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는데, 태평씨가 삶을 사는 것인지, 삶이 살도록 하는 방식에 구속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헷갈릴때가 종종 있다. 태평씨가 자고 일어나 일하고 먹고, 일을 마치고 먹고 자는 사이클 속에서 새로운 무엇을 생각해 내거나 하지 않으면 시간이 마냥 지나가 버리는 것 같다. 태평씨는 그 속에서 무기력, 식상을 느끼고 활력은 애써 발휘하지 않는 한 도무지 그러한 것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본능이 억압받고 있다!
본능이란 반드시 경험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 경험이 없었어도 드러나는 행위, 목적도 계획도 없이 저절로 드러나는 행위를 하도록 하는 하는 특성, 본래적 능력이다. 본능은 과거에 경험한 바가 없어도 발현된다는 점, 본능적 행위가 특별한 목적이나 계획하에 이루어지지 않는 점에서 식물에게고 있고, 동물에게도 있다. 물론, 인간인 태평씨에게도 있다. 본능은 지구상의 모든 개체에게 생래적으로 별다른 노력없이 장착되어 있는 능력인데, 위험을 피하거나 번식하거나 쾌감을 추구하고 고통을 기피하도록 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생명체에게 본능이 상실되지 않고 전래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태평씨는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을 금지받은 상황에서 사회화되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인식되었거나 인식되지 못 하였거나 한 본능을 스스로 또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노출시키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 본능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본능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은 저급하다는 평가도 본능의 발현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준이다.
본능은 전혀 개체의 의지나 물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전달되어 언젠가 그 알고리즘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습관과는 다르다. 습관은 반드시 경험을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어느 순간에 반드시 개체에 작용해 변화를 일으켜 반복되도록 하는 것이다. 태평씨의 습관은 언젠가 경험한 그 무엇이 그 순간의 상태로 인해 반복적으로 그러한 행위를 하도록 만든 것으로 본능과는 차이가 있다.
습관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만 본능은 그런 구분이 없다. 태평씨가 김부장에게 "야! XXX야!"라고 말하고 싶거나 김부장의 아가리를 한대 휘갈겨 주고 싶은 것은 본능이 스멀스멀 작용하는 것인데, 스트레스라는 위험을 방지하고 기피해서 안전을 위해서는 본능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이 유익하다. 하지만, 태평씨의 본능은 그러한 위험상황에서도 억압된다. 억압되어야만 한다. 태평씨는 당시 본능을 억압하지 못 하면 더 큰 위험(실직, 징계 등)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태평씨는 본능을 본능적으로 제압했을까. 태평씨가 학습한 사회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욕하면 안된다는 이성적 습관, 먹여 살려야 하는 처자식의 존재로 인한 책무 때문에 본능을 억압한 것일까.
신이 인간을 자신의 모습대로 창조했고, 인간의 본능은 그때부터 발생되어 수십 세대를 걸쳐 후손인 태평씨가 물려받은 것인데, 자연계에서는 본능대로 살아야 잘 사는 것, 예컨대, 뻐꾸기는 자신의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끼워 넣어 둥지 주인인 새가 부화, 부양하도록 하는 본능에 충실해야 잘 사는 것인데, 인간계에서는 본능대로 살면 안된다가 정답처럼 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인간사회의 질서를 위해서?.
태평씨는 본능의 억압과 의식적인 무시로 인해 지쳐간다. 식물과 동물에게 본능적 행동이 유용한 것이라면 사람에게도 본능적 행동은 유용한 것이다. 나쁜 본능이 사실은 없는 법이다. 본능은 고통을 피하고 안전을 추구하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사회는 나쁜 본능을 구별해 낸다. 더불어 좋은 본능 역시 나쁘게 도매급으로 평가된다.
왜 사는게 힘든지 알어?. 태평씨는 이렇게 말했다. "본능대로 못 살기 때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