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론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진행된다. 특히 생명의 탄생 직후부터는 죽음과 소멸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진행한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하는 유일한 생명체이다. 물론, 동식물도, 돌들도, 바람도, 딛고 사는 지구도, 저 뜨거운 태양도 시간에 영향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다. 인간은 시계를 만들어서 시간의 흐름을 측정하고 있지만 매일 뱅글뱅글 바늘만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보다 시간이 맴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시간은 흐른다. 한번 흐른 시간은 귀환하지도 반환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둔감하다가 시간이 흘러 남은 시간이 흘러간 시간의 양보다 적다고 느낄 때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예민해진다. 시간은 흐르지만 시간이 흘러간 궤적의 특정지점에서만 존재가 정의된다. 마치 '1994.년 고등학생이었고, 1995. 대학생이었다' 처럼.
그런데, 우리는 소환도 반환도 불가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있다. 'Kill-Time'. "그냥, 시간 죽이고 있어!"라고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시간은 연속성을 지니고 흐르기 때문에 때울 공간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간 때우기를 자주 하고, 시간은 관념적이어서 생명이 없음에도 시간 죽이기를 반복한다. 시간 때우기처럼 소중한 자원낭비는 없다. 약속시간, 약속장소에 약속보다 일찍 도달하면 우리는 시간 때우기를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 때우기는 구멍난 시간의 연속적 흐름에 무언가를 덧대어 땜질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시간을 의미없이 흘려보내는 것임에도 '때운다'의 보강한다는 의미를 사용한다.
시간은 때워서는 안되고 채워야 한다. 시간 채우기도 시간 때우기와 마찬가지로 공백이 없는 시간의 연속적 흐름에 대해 무언가를 덧댄다는 점에서 동일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시간 채우기란 부작위, 무의미, 무의식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시간 때우기와는 사뭇 다르다.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작위, 의미, 의식적인 개념을 구해 와야 한다.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채웠습니다"라고 하지, "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많은 시간을 때웠습니다"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을 때울 것인가, 시간을 채울 것인가는 시간을 관념하는 모든 인간에게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무채색으로 흐르는 시간의 연속적 흐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의 흐름을 자연적 상태 자체로 방관할 것인가 중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신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해 시시각각, 시간의 쪼개짐과 분열에 대해 늘 예민해야 한다. 그저 시간 때우기만 한다면 일회적인 순간의 포기이자 방관일 뿐, 유한함 속에서 유의미한 경험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시간을 채워야 한다.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라고 할 때, 의미있는 그 무엇으로 시간을 채운 것이다. '알'을 채웠기 때문이다. 시간과의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다.
무기력하게 시간 때우기를 할 것인지, 기력있게 시간을 채울 것인지는 자신의 유한한 자원적 시간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해 명료함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