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유교문화권에서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은 효의 기본 구성요소로 되물림되어 왔다.
그런데, 누군가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 지킨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죽음은 호흡이 끊어지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수 없으며, 교감의 타임이 단절된 것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 위암말기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밖에서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빨리 집으로 들어오라 해서 씩씩거리면서 집으로 들어왔더니만, 암세포로 부패한 할머니의 불룩한 배와 바싹 바른 사지, 그리고 가래끓는 숨소리만이 어린 나에게 '이게 뭐지' 의아스러움을 제공했다.
그리고 잠시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잠시 의사가 되어 암을 정복하고 말겠다는 야심찬 다짐을 했다가 문과생이 되고 말았다.
가족력이라는 것이 있다. 암으로 누군가 죽은 사람이 있는 집안 사람의 경우에는 암으로 죽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중의 누군가가. 일종의 확률적 의미의 또 다른 족보이다.
이런 가족력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아버지도 혈액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다. 발병한지 8일만에 나의 아버지는 나랑 더 이상 소주잔을 기울일 수 없는 절대적인 단절을 내게 제공했다.
어린 시절과 30세가 넘어 두 번의 가까운 죽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이 그다지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소멸하는 것은 늘 서글프고 허망하다는 것.
가끔 아침에 조용히 눈을 뜨고 싶지 않고 이대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삶이 주는 무게감이 가끔은 버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상 허락치 않는 문제의 영역이다.
힘들 수 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시시각각 혈관과 뼈속을 스며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늘이 이렇게 모지라고 미천한 우리의 인생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끈질기게 철학과 미덕을 제시하면서 지지하게 삶을 연명하게 만드는 것일까.
누구나 한 점으로 시작해서 한 점의 흙으로 마감한다. 하지만, 그 한점에서 한점으로 끝나는 '선'과 '면' 사이에서 나로인해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의미가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라고 세상이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