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
SF영화, 우주 탐사 부류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이 외부 탐사를 마친 후 기지나 탐사선 내부로 진입할 때, 일정 공간에서 소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외부 공간에서 몸에 묻은 바이러스, 세균 등을 제거해 내부생활을 하면서 전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퇴근할 때, 퇴근을 하면서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이러한 소독장치가 있었으면 한다. 밖에서 겪은 스트레스나 고통, 그리고, 불만 등을 집을 들어서면서부터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도록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 관계도 없고, 그 일로 인해 빚어진 나쁜 감정을 전이받지 않아야 할 가족들에게 전염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하려고 다짐을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 긴장이 풀리면 얼굴에 근심과 불만, 분노가 어느 정도는 묻어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나의 힘든 외부 사회생활을 가족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일말의 기대도 서려 있다.
가장의 얼굴에 묻어나는 삶의 고단함은 연쇄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아내는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기를 삼가한다. 자기의 고단함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가장의 고단함은 배를 더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학교에서 있었던 문제들, 성적, 교우관계 등에서 벌어진 고민들을 꺼내 놓기가 민망해 진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일과 삶의 적당한 균형을 표상하는 표어이다.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럭저럭 건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일찍 퇴근해서 물리적인 저녁만을 함께 먹는 것은 일과 삶의 균형점을 찾은 것이 아니다.
각자가 외부 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고통과 고난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일그러진 얼굴을 서로 마주하면서 각자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시간과 상황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응석을 부리는 행위, 각자가 겪은 고통만큼 희생하고 있으니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잘 해야 한다는 묵언의 강요의 장일 뿐이다.
더구나 상대가 나보다 더 크게 고생하고 있다고 여기면 각자의 힘든 부분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없게 된다. 내적으로 삭히게 되고, 고통의 크기를 나름의 잣대로 재단해서 결국, 대화는 단절되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질 뿐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꾼다면, 시간상 조기에 귀가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가 사회생활을 통해 겪은 고단한 것들을 전이 내지 전염시키지 않도록 정화를 시키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