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평변호사칼럼
정월 초1일 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과 조카 봉, 아들 회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서운한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병사의 군관 이경신이 와서 병사의 편지와 설선물과 장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바쳤다.
2월 25일 병진. 흐림. 갖가지 전쟁 방비에 결함이 많으므로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고, 첨사를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보냈다. 이곳의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최하이건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까지 올렸기 때문에 죄상을 조사하지 못 하니 가소롭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으므로 그대로 머물렀다.
3월28일 무자. 맑음. 동헌에서 공무를 보았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조리 맞았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이순신 장군의 일기, 난중일기 중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기재한 일기 중 한 내용이다.
난중일기는 워낙 유명해 드라마, 영화 등의 제목 또는 소재가 된 탓에 고유명사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일본이 침략을 할 것이냐, 하지 않을 것이냐 등에 대해 조정이 논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미 일본 해적의 노략질은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고, 상당수가 납치도 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지 2년이 경과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필드에 와 보니 군비의 현황이나 군사는 물론 지휘관들의 근무태도와 자세가 부실했었던 모양이다. 전쟁을 치를 인적, 물적 자본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상벌관계를 명확히 하는 데에서 조직의 기강을 바로잡아 나갔고, 특히, 곤장을 많이 내렸다. 당시 태형은 국법에 정해진 형벌의 하나이다. 그리고, 교수형도 간간히 하였는데, 이는 공시가 되어 군법과 군령의 엄정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바쁜 와중에도 일기를 빠짐없이 작성하였는데, 날짜와 날씨로 서두를 시작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늘 어머니 걱정이 떠나지 않은 듯 하고, 그런 반면 공무에 대한 염려도 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날씨에 대해 아주 세세히 기억하고 기재한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상당히 예민하고 관찰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틈이 나면 화를 쏘았는데, 한번 쏘면 100발씩 쏜 것으로 보인다. 활 10순을 쏘았다는 것은 '순'이 10을 뜻하기 때문이다.
군무에 적합하지 않은 관리들에 대해 죄상을 조사하여 처벌하여야 함에도 이를 표창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당시 얼마나 나라의 기강이 아래에서부터 헤이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난중일기를 읽다 말았으니 계속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