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스케치_리스본
서쪽의 끝 한 도시에 왔다. 서쪽의 끝이라지만 내 입장에서 좀 더 친근한 동쪽 대륙의 끝과도 가깝다. 이 도시는 현재 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나는 도시를 좋아하지만 일상보다 비 일상이 지배하는 도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여긴 왠지 구경꾼들이 더 많은 도시다.
그런데 도시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일상의 사건이 일어났다. 회전교차로를 도는데 옆에서 들어오던 차가 내 범퍼를 받은 것이다. 내가 불편할 건 없었다. 나에게는 경험의 시간이 잘 흘러갔다. 여긴 뭔가 느린 도시다. 오래된 벽들과 길바닥을 보면 때가 끼어있다. 관리되지 않는 도시다. 마찬가지로 자동차 보험을 들어도 수습이 빨리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돈이라기보다는 있는 게 시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도시다.
바다 주변의 공원들을 돌다가 간식을 사 먹었다. 맛은 좋다. 건물의 장식도 좋다. 하지만 나는 이 맛에 대해서 뭐랄까 세계적인 맛이라고는 구분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같이 주는 계피와 설탕 그리고 포장 봉투와 스티커가 디자인이나 포장 방법에 있어서는 독특하다. 그런 면에서 한번 사 먹을 가치가 있다고 느껴진다. 하늘 위에는 해가 쏟아져 내렸다. 공기는 살짝 습하지만 바다 냄새는 나지 않는다. 하늘은 미친 듯이 맑고 푸르다.
하지만 도시의 견물 벽들과 거리의 바닥은 까만 때가 까어있다. 공기가 더러운 건지 청소를 안 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때가 낀 도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쓰레기가 날아다니고 길 한 복판에 장작불로 군밤을 굽는다. 매캐한 장작불 냄새가 난다. 연기는 별로지만 굵은소금을 한 움큼 뿌려 주는 군밤은 맛이 좋다.
거대한 빌딩 한편에 애완견과 애완 돼지와 같이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집시여인도 있다. 한참을 걷다가 건물의 쇼윈도에 하늘이 파랗게 비치는 것을 보고 감탄하며 걸음을 멈추고 보았다. 그때 인도풍의 옷을 입은 여자가 구걸을 하러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쇼윈도의 한쪽에 빨간 내복 같은 게 비쳤는데 그 여자였다. 나는 다시 못 본척하고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요즘 유럽 도시의 어디를 가도 한복판에는 미국의 가장 유명한 카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이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전 세계 경치 좋고 유명한 곳은 다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언덕길도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온갖 곳을 다 누비고 다녀도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기라고 하지만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만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길의 저 끝에 뭔가 거울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게 보였다. 버스가 지나가고 다시 길 사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때가 낀 길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저 멀리 바다의 표면이 햇볕을 반사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여행 후에 돌아와서는 사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자료 사진을 찾을 일이 있어서 뒤적이다가 문득 눈에 띄는 사진을 찾았다. 그 도시에서 내가 찍은 사진이었다. 내가 찍었지만 나에게는 낯설고 기억도 나지 않는 사진이었다.
참 이상하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 찍은 것일까? 한참 들여다보니 그제야 내가 봤던 도시의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스르륵 돌아가기 시작했다.
삶은 원래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다. 복잡한 거리의 끝에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는 태양을 받아 반짝이며 빛났다. 차를 타고 도시를 지나가다가 보수가 되지 않고 너덜거리는 건물의 벽들이 많이 보였다. 유명한 거리를 한 블록만 벗어나도 보이는 찢어진 벽지 같은 낡은 벽들은 화려했던 과거를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리의 가로등 페인트 색부터 광고 포스터 색까지 흔하게 쓰지 않은 색들도 보인다. 사람의 내면을 보는 것 같은 도시다. 욕망과 비참함이 희망과 절망이 여기저기 거리에서 튀어나오는 도시다. 서쪽의 끝이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한 도시다.
여긴 시인이 사랑한 도시다. 느낌대로 가지각색을 표현하고 숨기는 도시다. 가봤지만 가보지 못한 것 같다. 읽었지만 어렴풋이 느낌만 조금 알겠는 시 같은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