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턴인식_겨울
어제는 유명한 사진가의 사진을 봤다. 여러 사진들 중에도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있었다. 차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한 눈이었다. 나도 그런 눈의 질감과 색을 알고 있다. 도시의 때가 살짝 묻은 옅은 회색의 눈이다. 입자는 아주 작고 곧 녹을 듯 하지만 쉽게 녹지 않는다. 손으로 뭉치면 뭉쳐지지도 않는다.
오래전 나는 이 사진과 비슷한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사진은 70년대 뉴욕의 눈 쌓인 거리였지만 그림은 1800년대 중반쯤의 파리근교의 눈 쌓인 거리다. 현실의 눈은 차갑지만 내게 보이는 사진과 그림의 눈은 차갑지 않다. 온도보다는 눈이 연상시키는 그 계절의 여러 가지 추억들이 먼저 떠올라서 그렇다.
화이트크리스마스
나는 한동안 긴 겨울을 가진 동네에서 살았다. 10월 중순부터 다음 해 4월 중순까지는 종종 햇살이 눈부시고 따뜻한 날은 있어도 겨울이라고 보는 게 무난했다. 특히 겨울이라는 계절의 특성인 차가운 바람과 눈은 11월이나 12월보다는 2월이나 3월에 훨씬 더 많이 나타났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는 화이트 밸런타인이 더 많았다. 그리고 바람이 차가워서 감기 걸리기 쉬운 3월은 윈디 화이트데이였다. 서울도 체감온도상으로 12월보다 2월이 더 춥고, 3월의 바람이 더 차갑다.
구름
겨울의 바람과 눈은 그렇다 치고 문제는 겨울의 태양이었다. 5월부터 가을까지 하늘은 미친 듯이 파랗고 태양은 뜨거웠다. 하지만 10월이 지나가면서 비도 안 오는데 하늘에 구름이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하늘은 우중충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태양은 같은 태양인데 여름의 태양이 100와트라면 겨울의 태양은 50와트였다. 대낮인데도 어두침침하고 우중충한 하늘이 지속되는 날이 시작되면 그건 겨울을 알리는 징조였다. 그런데 내가 사는 동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북위도 40도 이상이고 내륙이면서 큰 호수를 끼고 있는 도시는 구름이 태양을 지배하는 기간이 겨울이다.
밤하늘
몇 번의 긴 겨울을 지내고 나서 겨울이 오면 우중충한 하늘을 별로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은 밤이 길었다. 어차피 밤에는 우중충한 하늘 따위는 없었다. 모두 검푸른 하늘뿐이었다. 오히려 겨울밤의 어둠 속에서 더 밝아 보이는 달빛과 차갑고 맑은 공기가 좋았다. 여름에 야외에서 바비큐를 하는 것보다 눈 쌓인 겨울에 하는 게 더 좋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겨울에는 야외에서 고기 구울 때 덥지도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모기나 벌레도 없다. 그리고 밤하늘도 땅도 고요하고 숯불에 고기 타는 소리만 들린다. 고요한 밤이라는 성가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눈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함박눈이라고 불리는 입자가 커다란 눈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 동네의 눈은 얇은 입자다. 소리 없이 내리는데 녹지도 않아서 한두 시간만 내려도 발목까지 금방 쌓였다. 내 첫 번째 겨울, 한 시간 정도 시험을 보고 나왔더니 발목 위까지 푹푹 들어가게 쌓인 눈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눈이 온 게 좋았다. 눈길에 미끄러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이 차를 몰고 집에 갔다. 입자가 큰 눈은 금방 녹지만 작은 눈은 잘 녹지 않는다. 잘 녹지 않아서 금방 쌓이고 녹아도 슬러시 같은 질감을 유지하다가 밤이 되면 그대로 언다. 비처럼 뿌리는 함박눈보다는 작은 입자로 촘촘히 내리는 눈을 더 조심해야 한다.
영하 10도
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나와서 살 때였다. 1월 학기 초였다. 한파가 왔는데 거의 일주일 동안 연속해서 최고기온이 영하 10도 이하였다. 아무리 겨울이 긴 동네여도 온도가 그렇게 낮은 때는 없었는데 뉴스에서도 계속 기온 보도만 했다. 뉴스에서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끓는 물을 밖에다가 뿌리면 바로 눈 같은 얼음이 돼서 떨어지는 실험을 했다.
그때 영하 10도 이하의 며칠은 아무리 따뜻한 실내라고 해도 조금만 움직이면 냉장고를 열었을 때 차가운 기운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이보다 더 추운 기간을 지내본 적이 없다. 하루의 최고 기온이 영하 10도가 안된다는 것은 정말 추운 날이다. 요즘 겨울에 영하 15도가 어쩌고 하고 사람들이 춥다고 해도 나는 별로 추운걸 못 느끼는 것은 그때 경험 이후 내 추위에 대한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져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