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현실_해 질 무렵 이름 모를 길가에서
할머니 친구들이 모였다. 나는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간다. 저녁인데도 날이 덥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얇은 면티를 입혔다. 입기 싫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나를 보고 걱정할까 봐 그 시간을 덜어내 주기 위해서 억지로 입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바람 한 점이 없고 덥다. 할머니와 살려면 옷을 과하게 챙겨 입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할머니 친구들은 모두 정옥이 할머니 집 앞의 나무 그늘 밑 평상에 앉아서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가면서도 연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을 힐끔 거리며 본다. 나를 좋아하는 할머니도 있고 무서워하는 할머니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할머니들 사이에 작은 바구니가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위로 살짝 보이는 붉은빛 도는 물체는 분명히 고구마다. 너무 멀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고구마가 분명하다.
할머니는 나보다 서너 발자국은 앞서서 걸었다. 앉아 있던 할머니들은 웃을 거리가 생겼는지 뭐라고 이야기를 하다가 크게 웃는다. 나는 빨리 할머니를 따라가야 하는데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 어쩔 수 없이 나무 옆에다 오줌을 누는데 할머니가 내가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서 이상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빠른 걸음으로 정옥이 할머니 집 앞에 먼저 가버렸다. 나는 "끼웅"하고 소리를 냈다. 할머니를 관심을 끌려고 했지만 이미 할머니는 내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빠른 걸음으로 멀찌감치 가버렸다. 나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 치면서 급하게 따라갔다.
내가 평상 앞에 다다르자 할머니가 말했다. "좋지?"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할머니는 아마도 내가 오줌을 누고 와서 좋냐고 물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밖에 나와서 바람 쐬니까 좋냐고 물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뭐든 할머니는 내가 좋으면 좋다고 생각한다. 나도 할머니가 좋으면 뭐든 좋다. 할머니가 평상 위에 걸터앉아서 다른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는 평상 위에 놓여 있는 바구니를 안 보는 척하고 들여다보았다. 내 예상이 맞았다. 고구마였다. 대화에서도 간간히 고구마와 허리가 아프다는 소리가 들린다. 파스 냄새가 숙이 할머니 허리에서 나는 걸 보니 할머니가 텃밭에서 캐서 삶아 온 고구마 같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나를 보면 항상 품에 안아서 배를 만져주는 숙이 할머니가 드디어 나를 안았다. 평상 안쪽에 앉아 있어서 나를 보지 못할까 봐 내가 일부러 평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두리번거린 게 적중했다. "저녁에 뭘 먹었는데 배가 이렇게 빵빵할까?" 할머니는 내 배를 만지면서 말했다. 저녁에 많이 먹은 것도 없다. 그냥 먹던 대로 밥 한 그릇 먹었을 뿐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원망스러웠다.
"끼웅" 내가 살짝 칭얼거리자 할머니는 내 옷을 만지며 말했다. "이거 옷이 꽉 껴서 그런가? 더운데 이거 왜 입혔어. 애가 답답해 보이는데." "우리 재동이가 살이 쪄서 옷이 자꾸 올라가. 간식 주지 말라고 우리 애들이 그랬는데." 할머니가 숙이 할머니가 나에게 주려던 고구마를 뺏어갔다. "재동이 고구마 주지 말어. 금방 저녁 먹고 나와서 안돼." 나는 내 입 앞에 왔던 고구마가 사라지는 걸 보고 다급하게 발버둥 쳤다. 얼른 일어나서 고구마를 한입이라도 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뱃살 때문인지 쉽게 일어나 지지 않았다. "재동이 배가 나오긴 했어. 나도 그 생각은 했지. 이거 봐. 배가 나와서 못 일어나네. 우리 재동이 먹는 거 줄이고 운동해야겠다."
그날 나는 고구마를 한입 얻어먹었다. 우리 할머니가 김치와 물을 가지러 간 사이에 숙이 할머니는 내 입에 고구마를 조금 넣어줬다. 그러면서 말했다. "재동아, 너도 이제 조금 덜 먹어야 돼. 나이 들면 먹는 거 줄여야지 배 나온다. 말도 못 하는 짐승이 먹고살겠다고. 에고 가엾어라." 내가 입맛을 다시면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숙이 할머니는 더 이상 고구마를 내 입에 넣어주지 않았다.
집에 와서 거울을 봤다. 다리 사이에 둥그렇게 배가 나와있었다. 소파밑으로 들어가 봤다. 다시 나오는데 배가 전보다 몹시 빡빡하게 끼여서 여러 번 발버둥 쳐서 나왔다. 확실히 눈으로 볼 때보다 뱃살이 늘은 게 느껴졌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쉽게 빠져나왔었는데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틀림없이 이 가운데 부분으로 들낙 거렸다. 나는 그 자리를 확인했다. 내 배가 나온 게 아니라 소파가 밑으로 가라앉았을지도 모른다. 자세히 살펴봐도 소파는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재동이 삐졌나? 말도 못 하는 게 고구마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삐져가지고. 얼른 나와라. 할머니가 고구마 줄게. 얼른 나와." 나는 소파 밑에서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어서 할머니를 쳐다봤다. 할머니 눈에서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 뱃살 따위는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할머니 아들이 며칠 전에 와서 한말이 생각났다. "재동이한테 먹을 거 많이 주면 병 생겨요. 엄마 그거 잘못된 사랑이라고요."
나는 소파 밑에서 머리와 어깨까지는 잘 빠져나왔다. 하지만 배부터 엉덩이까지는 발버둥 치면서 소파 밑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힘이 들어서 "끼융" 소리를 내고 할머니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할머니의 무릎은 따뜻했고 내 입에 넣어주는 고구마는 달콤했다. 잘못된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은 할머니의 사랑 때문에 행복했다. 내가 좋으면 할머니는 좋은 거고 할머니가 좋으면 내가 좋은 거다.
얼마나 긴 시간을 행복할지 모르지만 이 순간이 한껏 소중해서 "끼웅"하고 조금 크게 맛있다고 외쳤다. 할머니는 그런 내가 기특한지 엉덩이를 두드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