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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Aug 21. 2023

나만의 지진

도시 스케치_구마모토

새해가 시작된 거리는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낯선 거리와 사람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추위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연말에 미야자키에서 시작된 나의 남쪽 규슈 지방 여행은 가고시마를 지나 구마모토로 이어졌다. 나는 구마모토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를 많이 돌아다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미 지난 4일 동안 미야자키와 가고시마에서 나의 에너지를 쏟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예상보다 추운 날씨가 한몫을 했다. 추운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추운데 돌아다니는 것이 너무나 부담되었다. 이상기온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남쪽 지방이 이렇게 추울 거라 생각 못하고 얇은 옷을 가져온 내 탓도 있었다. 

그러나 호텔 방안에만 있는 것도 무리였다. 하늘이 너무나 파랗고 공기가 맑았기에 밖으로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기차역에서 호텔까지 올 때는 노면 전차를 이용했었다. 호텔 앞에 노면전차를 타고 구마모토 성에 가는 데는 두 정거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너무 파랗고 공기가 맑아서 걸어서 성으로 가기로 용기를 냈다. 구글 지도에 의하면 아무리 늦게 걸어도 이십 분 이내에 구마모토 성에 도착하게 되어있었다. 나는 맑은 공기를 벗 삼아서 차가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걸을수록 해가 들지 않는 빌딩 사이에 갈 때면 날은 점점 추워졌다. 하지만 거리는 깨끗하고 조용해서 시내 산책을 하기에 좋았다. 성에 가까워오자 멀리 성이 보이고 천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나무들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너무 고요하고 나무들이 흐트러짐이 없어서 그림 속에 나오는 잘 정돈된 정원을 걷는 것 같았다.

성의 입구는 언덕 위에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가는 대로 슬슬 따라서 올라갔다. 내가 걸어왔던 빌딩 숲과는 달리 이 도시의 가장 큰 관광지답게 그곳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언덕으로 올라가자 성이 보였다. 그러나 성의 곳곳에는 성벽의 돌이 무너져 있거나 나무로 지지하여 놓는 등 여러 가지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이 보였다. 몇 년 전 일어난 지진의 흔적들이었다. 일본을 많이 다녔지만 도쿄에서 작은 지진을 호텔방 누워서 경험한 것 빼고는 이렇게 지진의 흔적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형화된 관광지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성을 산책 삼아 계속 걸으면서 둘러보았다. 그렇게 걷다가 다시 시내로 내려왔다. 해가 저물려면 한 시간은 더 남아있었다. 구마모토 시청의 전망대에서 구마모토 성을 보려고 성의 반대편에 있는 시청건물로 왔다. 전망대는 시청의 가장 위층에 있고 별다른 설명도 없으며 사람도 없었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한 건물일 뿐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조용하고 붐비지 않음이 좋았다. 창을 통해서 성과 푸른 하늘의 조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날 저녁이었다. 모처럼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파 저녁을 어디로 먹으러 갈지 고민하면서 호텔 방의 책상에 앉아있었다. 휴대혼을 뒤적이며 식당을 찾았다. 내 방 창으로 건너편 길에는 식당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제법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저녁시간을 조금 피해서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정말 순식간에 건물이 휘청거리는 어지러운 흔들림이 있었다. 2013년에 도쿄 출장 중에 호텔에서 느낀 작은 지진이 아니었다.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고 내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몇 초가 지나고 휴대폰으로 구마모토에 지진이 났으니 조심하라는 재난 안내 문자가 왔다. 다시 사방이 종요해졌다. 나는 짐을 싸서 어딘가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나 큰 흔들림이었다. 그 흔들림이 다시 오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몰려왔다. 짧지만 몹시 강렬한 지진의 아찔한 흔들림은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안절부절못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식당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나만 홀로 지진을 느낀 사람 같았다. 갑자기 내 두려움이 몹시 어색했다. 나는 호텔 방을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왔다. 호텔 로비의 직원도 거리의 사람도 아무 일도 경험하지 않은 듯이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혼자 악몽을 꾼 건지 어리둥절했다. 나도 다시 태연하게 저녁을 먹고 잠을 잘 자고 다음날 예정된 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 지진은 내가 졸다가 꾼 꿈이 아니었다. 내 휴대폰에 재난 문자 메시지로 분명히 흔적을 남겼다. 절대 내가 혼자 꾼 꿈이 아니었다.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일은 그저 감당한다. 여러 번 경험하면 점점 무뎌져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쳐 이겨내며 살아왔다. 구마모토는 인간이 극한 환경에서도 어떻게 극복하며 계속 살아가게 되었는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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