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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Dec 01. 2024

3 구역의 미네랄워터

12.4-12.6

12.4

“여기 온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재영이 한참을 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돌아다니다가 윤이가 있는 테이블에 와서 말했다. “어떤 이상한 사람을 말하는 거야?” “아직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발음이 이상한 사람들이 좀 있네.” “아무래도 여기는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선천적인 요인인 것 같아서. 그런데 아까 여기 계시던 경감님은 어디 가신 거야?” “ “응, 좀 전에 방으로 올라갔어. 우리도 오늘은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내일은 밖에도 돌아다녀보고 싶어. 오늘 3급 시민들을 보니 나와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더라. 위험하지 않을 거야. 내일 나랑 같이 다녀 줄 거지?” “내일 하루 정도만 같이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내일 저녁에는 돌아가야 돼. 할 일이 많거든.” 재영과 윤이가 방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근데 저쪽 복도에 있는 방들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인 가봐.” “응, 예약 손님들이 가는 곳으로 알고 있어. 오늘은 영업을 안 해서 복도를 막아 놨지만 평상시에는 저쪽으로 가는 예약 손님이 홀의 손님보다 훨씬 많아.” 재영은 흥미롭다는 듯이 복도 쪽을 유심히 보았다.   


“여긴 밤이 우리가 사는 곳보다 아름다운 것 같아. 저 불빛 들 좀 봐.” 재영은 호텔 방에 들어와서 밖을 내다보면서 윤이에게 말했다. “불빛들이 반짝이며 만들어내는 무질서의 아름다움이지. 게다가 여기는 3 구역에 있는 건물 중에는 가장 높은 건물이고 우리가 꼭대기 층에 있으니 낮에는 아마 저쪽 경계 지역까지도 보일 거야.” “계획 없이 건물을 지었던 과거 그대로라서 거리는 구불구불해. 그리고 저 멀리 공장 지역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라. 언덕의 주거 지역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여기 시내 거리에서는 광고판이 반짝여. 옛날 영화에서 보던 장면을 상상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재영은 3 구역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모든 것은 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허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제니스가 우리에게 특별히 좋은 방을 배정해 준 것 같아. 꼭대기층이라 아래층 소음도 하나도 들리지 않잖아.” 하지만 윤이는 재영이 놀라워하면서 쳐다보는 야경에는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내일 장례식이 끝나면 돌아갈 거야.” 재영은 윤이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윤이는 재영이 잠든 모습을 보고 방을 나왔다. 조용한 복도에 가만히 서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복도의 끝에서 끝까지 다 걸어봤지만 가장 꼭대기층에는 아무래도 자신과 재영 이외에 묵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처음 왔던 오 층의 제니스방으로 갔다. 오 층도 그가 있던 꼭대기 층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머물지 않는 듯이 조용했다. 제니스의 방 앞에서 벨을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니스는 여기 없어요.” 뒤에서 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이가 돌아보자 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알고 싶어서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근데 혹시 몇 층에 머무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가장 꼭대기 층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와 경감 님은 여기 오 층에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럼 쉬러 가보겠습니다.” 윤이는 케이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더 이상 오 층에서 서성거리고 싶지 않았고 케이의 질문에 답하기도 귀찮았다. “혹시 같이 오신 친구분을 또 볼 수 있을까요?” 윤이는 못 들은 척하고 계속 엘리베이터까지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케이가 따라오는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친구분을 내일 또 뵐 수 있을까요?” 엘리베이터 앞까지 케이가 따라와서 윤이에게 물었다. “내일 그 친구는 일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여기 있을 겁니다. 근데 무슨 일로 친구를 보려고 하시는지요?”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12.5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멀리 보이는 길의 끝에 파란색 버스 한 대가 지나갔다. 윤이와 재영이 주클럽을 나와서 십분 이상 걸어 다니는 동안 처음 보게 된 움직이는 물체였다.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재영은 그래도 처음 출발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윤이는 재영의 발걸음의 속도를 맞춰주려고 노력할 뿐 거리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었다. “저랑 같이 가시죠.” 윤이가 뒤돌아보니 케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케이씨, 천천히 오세요. 여긴 바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시간이 많아요.” 재영은 케이가 반가운지 인사를 건넸다. “아침부터 찾았는데 여기 계셨군요.” “제가 3 구역은 처음이라 돌아다니고 싶어서 나왔어요. 근데 사람이 안 사는 도시처럼 이렇게 조용해서 조금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저를 찾으셨다니 이유가 궁금한데요.” “재영 씨가 하시는 언어 연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요. 여긴 유흥지역이라 아침에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일 킬로 정도 가면 주거 지역이니 거기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도 그쪽으로 걷고 있었어요.” 윤이는 케이가 정보를 찾고 제공하는 것이 아는 척하는 것으로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같이 동행해도 될까요?” “그럼요. 제 언어 연구에 대해서 궁금하신 것도 저와 오늘 돌아다니다 보면 특별히 제가 설명드리지 않아도 아시게 될 겁니다. 제가 어떤 것을 관찰하는지 보시면 금방 이해가 될 겁니다.” 케이는 재영과 같이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윤이는 그들 뒤를 묵묵히 따라 걸었다. 거리는 조용했고 좀 전에 지나간 버스 이외에는 길을 지나는 차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그림 속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도시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저기 저 앞에 주택 단지가 보이기 시작하네요.” 회색의 고층 건물들이 듬성듬성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 뒤쪽으로는 공원인지 나무들이 무성한 숲도 보였다. 역시 거리에는 유흥지역과 같이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 아이들과 엄마들이 보입니다.” 케이가 가리키는 쪽은 주거 단지의 아파트 건물들 틈 사이에 있는 붉은 벽돌의 낮은 건물이었다. 흰색의 옷을 입은 여자들 몇 명과 그들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보였다. “저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보육센터입니다. 학교는 여기서 동쪽으로 이 키로 더 가야 합니다.” “우선 저기 보육 센터를 먼저 가봐요. 다리가 아프니 저 앞에서 조금 쉬었다가 어디 갈지 정해도 되니까요.” “아침 산책치고 너무 많이 걸은 거 아니니?” 윤이가 재영을 걱정하면서 물었다. “아니야. 하루에 십 킬로도 걸을 수 있어.” 케이는 윤이나 재영보다 빠른 걸음으로 보육센터 앞으로 갔다. 하지만 아까 보이던 사람들은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곳은 처음 봅니다. 모두 일하러 갔는지 주거 지역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케이는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폈다. 그는 자기가 볼 수 있고 찾을 수 있다면 시키지 않아도 주변의 모든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저기 할머니가 한분 걸어오네요.” 재영이 검은색 옷을 입은 다소 비대한 몸집의 할머니가 걸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중년여성이군요.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경고합니다. 저 여성은 폭력 범죄이력도 있고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케이의 경고와 동시에 윤이와 재영의 스케줄러에도 범죄 이력을 가진 사람이 접근하고 있다는 경고가 나타났다. 


“당신들 혹시 돈 있어?” 여자는 천천히 걸어오면서 윤이와 일행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그녀는 팔을 흔들며 다리를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일 만큼 걷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다. 여자가 팔을 흔들 때마다 검은색 옷의 팔 부분은 시스루로 되어있어서 그녀의 살이 튀어나올 듯이 비쳐 보였다. 그녀가 점점 다가오자 윤이는 재영의 팔을 잡아서 한 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어서 그냥 지나가세요.” 케이가 윤이와 재영을 보호하려고 그들 앞으로 나서며 여자에게 말했다. “어디서 온 로봇인데 나에게 큰소리를 치는 거지. 건방지게 로봇 따위가 사람에게 소리를 치다니.” 여자는 케이를 향해서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케이는 살짝 뒤로 물러나고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던 여자는 자기가 휘두른 팔에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이런 제장, 저런 로봇 때문에 아침부터 내가 넘어지다니.” 여자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워 보였다. 그때 재영이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잡아서 일으켜 주려고 했지만 너무 무거운지 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윤이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케이는 재영에게 다가갔다. “비키세요.” 케이가 여자의 양팔 사이에 손을 넣어서 가볍게 여자의 몸을 들어서 일으켜 세웠다. “빨리 가던 길이나 가세요.” 케이는 커다란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너보다 훨씬 힘센 인간들이 여기 많아. 날 무시하면 그들을 데려다가 혼내 줄테다. 로봇은 여기서 고철 덩어리밖에 안 된다고. 여기가 어딘지 알고 감히 로봇 따위가 이래라 저래라야.” 여자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잠시만요. 진정하시고 저랑 이야기를 잠시 나눌 수 있을까요?” 재영이 여자 앞에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돈을 줄 수 있어? 나한테 돈을 주던가 아니면 술을 사주던가 해줘요. 나는 그럼 며칠 밤을 새우면서 아가씨랑 이야기할 수 있어.” 여자는 재영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순식간에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눈빛도 몹시 간절하게 변했다.”네, 돈을 드릴 수 있습니다. 술도 사드릴 수 있고요. 그런데 여기 말고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데 걸을 수 있나요?” “그럼 나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어. 저기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할까?” 여자는 자기가 왔던 길 쪽의 회색 건물을 가리켰다. “그럼 더 좋죠.” “그럼 우선 술부터 사줘. 저기 앞에 가서 술 좀 사줘.” 케이는 재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까? 황색 경고등이 켜진 여자예요. 황색 경고의 의미를 아시잖아요. 저 사람을 경계하고 피해야 합니다. 위험할 수 있어요.” “경고등이 켜진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당신하고 윤이가 저와 같이 있는데 제가 위험할 수 있나요? 제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인터뷰를 해보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재영의 말에 케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윤이는 그들을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술을 어떻게 사야 하지? 술을 사 오는 것을 좀 도와줄 수 있어?” 재영이 윤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술을 사는 건 간단합니다. 여기 시민들은 돈을 내야 하고 우리는 그저 아이디 스캔을 하면 됩니다. 제가 다녀올 테니 윤이 씨는 여기서 경계를 하고 계세요.” 케이는 말이 끝나자마자 길을 건너서 술을 사기 위해 갔다. “로봇이 쓸모가 있는 건 이럴 때죠. 하지만 난 로봇을 좋아하지 않아요. 로봇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죽었고 나도 이렇게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자는 무슨 이유인지 또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그녀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윤이와 재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영은 그녀의 이야기가 진실을 반쯤은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돌아다니면서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터뷰를 분석하면 대부분 횡설수설하는 정신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을 어느 정도 담고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미루어 재영은 저 말 많은 여자가 관심이 갔던 것이다. 재영은 여자가 왠지 이 도시와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자기에게 알려줄 것만 같았다. 


12.6

여자의 집은 어두운 복도 같이 길게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 주변에는 빈 술병이 놓여있었다.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술병은 보기가 좋았는데 일부러 자리를 꾸며 놓은 것으로 착각이 들 수도 있었다. “술병이 이렇게 화려하게 보이는 줄은 몰랐어요.” 재영은 술병을 둘러보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윤이는 이미 많은 술병을 보아왔기 때문에 술병보다 자신 앞에 앉은 나이 든 여자를 꼼꼼히 훑어보고 있었다. “아가씨도 한번 마셔 볼래? 이 술은 정말 좋은 술이야.” “괜찮아요.” “이런 좋은 술을 사 오다니. 오늘 내가 기분이 좋을 수밖에. 나에게 무슨 이야기든 물어봐. 나는 다 답을 해 줄 수 있어.” 여자는 술병과 재영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술은 일단 조금 맛만 보고 우리와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다 마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만약 오늘 인터뷰가 마음에 들면 내일 또 좋은 술을 사드리고 인터뷰를 할게요.” 재영이 술병을 든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하지만 아가씨, 부탁인데 인터뷰를 너무 오래 끌지는 말아. 좋은 술을 앞에 두고 마시지 않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단 말이지.” “네, 그럼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난 오십 년 동안 이곳에서 산 재인이라고 해. 난 클럽에서 바텐더로 일했고 지금은 보다시피 집에서 놀고 있지. 우리 집은 원래 여기서 남쪽으로 더 내려간 숲 속에 있었어. 거기서 태어나고 어릴 땐 어디든 자유롭게 다녔는데 지금은 맘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집도 가족도 없어졌지. 우리 아버지는 기계를 잘 만졌어. 땅을 파고 다지고 돌도 부시고 지금은 로봇들이 하는 일인데 건설 노동자였어. 근데 아가씨 같은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 뭐 하려고 묻는 거야?” “전 없어진 언어들을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근데 아까 보니 로봇을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 아버지가 직업을 잃어서 인가요?” 


“로봇들이 우리 자유를 빼앗아갔어. 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집도 주고 일자리도 주고 병도 고쳐주지만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갑자기 우리를 다 흩어지게 했다고. 우리는 이 콘크리트 벽들 사이에 갇혀서 죽어가는 거라고.” 여자는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윤이와 재영은 여자 앞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 지르는 여자에게 놀라 뒤로 물러나 앉았다. 케이는 그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서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듣고 옆으로 다가왔다. “로봇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무능하고 게으른 유전자가 당신을 이렇게 살게 만든 겁니다. 앞으로 소리 지르지 말고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케이는 여자 옆에 서서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네가 그런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어림없어. 너는 로봇이고 나는 인간이라고. 네가 힘이 세다고 하지만 너보다 더 힘센 인간들이 여긴 많다고. 내가 그들을 부르면 너는 꼼짝도 못 할 거야.” 여자는 케이에게 말로는 크게 이야기했지만 눈빛은 케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그런데 힘이 센 친구들을 부른다고 아까도 말씀하셨는데 어떤 친구들이 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친구들이야. 인간 친구들. 여기에 우리 아버지같이 힘이 센 친구들이 많이 살아. 그 사람들이 로봇에게 빼앗긴 우리 자유를 찾아 줄 거야.” “혹시 그 친구들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알려 주실 수 있나요?” “나도 몰라. 그런데 그 친구들이 많아. 길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밖에 거리에서 기다리면 되나요? 아니면 근처에 클럽이나 그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그런 곳을 이시나요?” 재영은 답답했지만 여자에게 들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여자는 피곤했는지 의자에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재인 씨, 잠깐만 일어나 봐요. 제가 당신 거실에 있는 저 사진들과 여기 술병들을 좀 구경하다가 가도 될까요?” 재영은 여자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마음대로 해. 난 잠을 못 자서 조금 자야겠어.” “여기서 더 볼 게 있을까? 그냥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저기 사진들과 옆에 놓인 오래된 술병을 좀 보고 싶어. 난 괜찮으니까 너는 먼저 가도 돼.” “제가 재영 씨와 같이 있을 테니 윤이 씨는 먼저 가셔도 됩니다.” 케이가 재영의 옆으로 오면서 말했다. 윤이는 케이가 있기에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술 취한 여자의 로봇에 대한 경계심으로 봐서 어쩌면 케이 때문에 3 구역을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밖에 나가서 기다릴게.” 윤이는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그래, 그럼 우리도 곧 보고 나갈게. 좀 있다가 밖에서 보자.” 윤이가 나가자 재영은 여자가 잠든 뒤쪽의 거실장 쪽으로 가서 거기 진열되어 있는 술병과 사진들을 보았다. “이 사진을 보면 과거의 가족 형태를 띠고 있어요. 3대가 같이 있네요.” 재영은 여자의 어릴 적 사진으로 보이는 낡은 사진을 가리켰다. 그녀의 부모들과 할머니가 같이 집 앞에 서있는 사진이었다. “마치 이 사진은 역사책에서 본 것 같은 사진들이네요.” 케이가 사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현재 3 구역에서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서 살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후천적인 영향을 되도록 덜 받게 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과거에는 모든 가족들이 모여 살았으니 1 구역과 다를 바가 없었죠. 정부의 입장에서 3 구역의 열등한 인간들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지구 전체로 봐서는 생존을 위한 자원 활용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이죠. 지구열대화 이후 중앙정부는 3 구역의 시민들의 가족을 해체시키고 출생도 제한시키면서 인구조절을 진행 중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류는 생존 환경이 향상되었습니다. ” 케이는 사진 앞에 서서 계속 중얼거렸다. 


“이것 좀 보세요. 이건 알코올 중독자가 갖고 있을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재영은 술병들 사이에 놓여있는 병 하나를 집어 들고 케이에게 보여줬다. “미네랄워터를 술에 타먹었을까요? 아니면 그냥 사서 마신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여자가 이걸 돈 주고 사 마셨을 것 같지는 않아요.” “술 사 마실 돈도 모자라는데 건강을 위해서 미네랄워터를 사서 마시지 않을 거란건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사서 마신 게 아닐 수도 있죠.” 케이는 냉장고를 열어서 재영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들어있는 게 미네랄워터인데 저 여자가 사서 넣어두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 여자의 건강을 위해 주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중앙정부에서는 부엌의 수도를 통해서 마실 수 있는 물을 공급하죠. 그러나 여러 가지 영양소가 들어있는 미네랄워터보다는 영양이 훨씬 떨어지죠. 아까부터 여자가 말한 힘센 사람들이 여자를 위해 사다가 넣어 준 걸까요?” 케이는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한 병을 제가 가지고 가서 어디서 유통되었는지 내용물이 무엇인지 분석을 해봐야겠습니다. 지금 제가 제품을 스캔한 바로는 3 구역에서 팔고 있는 물이지만 여기 일반적인 시민이 사 먹을 가격이 아닙니다. 주로 외부인을 위한 물이죠.” “저도 그 물에 관심이 가네요. 혹시 분석이 끝나면 정보 공유를 부탁드립니다. 왜 이 여자의 집에 이 물이 있는지 수수께끼 같네요.” “알겠습니다. 이제 나가시죠. 아파트 밖에서 윤이 씨가 혼자 기다리고 있으니 이쯤에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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