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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Dec 07. 2024

중립인간 시대

13.0-13.2

13.0

“나는 오늘 우리와 성대 구조가 다른 사람들을 봤어." 재영의 말에 윤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잘 이해가 안 되는데." " 내 말은 분명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사람들의 대화를 가까이서 들었는데 그들은 인간의 성대 구조를 갖고 있지 않았어.” 재영의 설명에 윤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성대 구조를 갖지 않았다면 그건 새로운 로봇인가?” “로봇은 아닌 것 같아. 내가 보기에 겉모습으로 판단하기엔 분명히 인간이었어. 케이에게 스캔해 보라고 못한 게 후회가 되네. 그 사람들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아까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그 여자의 집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올 때 그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거든.” “그 사람들을 다시 볼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이라도 다시 케이랑 그 여자의 집 근처에 가 보는 게 어때? 대신 케이에게 앞으로 사람들을 보면 모두 스캔해서 정보를 받아 놓으라고 하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일단 케이에게 이야기해 봐야겠어. 근데 케이가 나랑 다녀도 괜찮은 걸까? 케이가 이수현 경감을 돕는 역할을 하는데 내가 방해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 “이수현 경감은 아마 여기서 제니스와 주사장을 추모하러 온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 같던데. 이수현 경감이 네가 발견한 특이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본인의 조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케이가 너와 동행해도 괜찮다고 허락할 거야. 내가 경감님에게 한번 부탁을 하고 올게.” 윤이는 재영의 방을 나와서 이수현 경감의 방으로 향했다. 


윤이가 경감이 머무는 5층에 내리자 복도에서 아래층 사람들의 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이는 이수현 경감이 묵고 있는 방으로 가서 벨을 눌렀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안에 없으면 1층의 바에 내려가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수현경감을 찾아야 했다. 윤이는 한때 3 구역에서 바텐더로 일할 정도로 사람들을 대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정보국에서 일하기 시작하고부터는 사람들을 대하는데 장벽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3 구역의 사람들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정보국 사람들의 마인드를 윤이도 알게 모르게 갖게 되었다. 방 안에서 인기척이 없자 윤이는 마지못해 일 층의 바로 내려가기 위해서 발길을 옮겼다.

윤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리셉션을 지나 바로 들어갔을 때 바에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입구에 서서 이수현경감이나 케이를 찾기 위해서 둘러보고 있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윤이가 바텐더로 일 할 수 있게 해 줬던 김사장이었다. 윤이는 이수현경감이나 케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금세 잊어버리고 김사장 옆으로 다가갔다. 


“사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윤이가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는 김사장에게 말을 시켰다. 그 자리에는 김사장은 물론이고 그가 바텐더를 할 때 자주 오던 손님들이 같이 앉아있었다. 하지만 김사장도 그렇고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도 뭔가 전과 달라 보였다. “사장님, 저 윤이에요. 기억나시나요?” “아, 많이 본 얼굴 같은데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기억하지, 바텐더로 일하던 윤이잖아. 반가워.” 김사장은 전과 같이 몸은 여전히 비대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에 주름살도 많이 생겨있었다. “시력도 그렇고 기억력도 점점 안 좋아져서 자네를 잘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아직 건강해 보이시네요.” “나도 주사장처럼 언제 죽을지 모르지. 우리들은 오래 살 운명은 아니잖아. 아는 척해줘서 고마워.” 김사장은 갑자기 윤이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사람들과 이야기해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기뻐서 눈물이 다 나오네.” 윤이는 김사장의 반응에 당황했다. “자주 나와서 사람들도 만나고 다니면 되잖아요. 여기 바에 와도 되고.” 윤이의 말은 김사장에게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김사장은 그의 몸이 그의 정신을 지배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생각대로 자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만약 죽으면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거야. 중앙정부에서 지정한 시간에 병원에 안 와서 나를 호출하다가 알게 되겠지.” 김사장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리자 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술을 건네주고 위로해 주었다. 


“윤이 씨를 여기서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얼굴이 좋아 보여요.” 윤이가 김사장의 테이블을 떠나 이수현경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다가 마주친 것은 이영이었다. 이영은 손님들 테이블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근데 혹시 이수현경감이나 케이를 봤나요?” “내가 별로 반갑지 않은 가봐요. 나는 윤이 씨를 다시 만나서 무척 반가운데.” “나도 반가워요. 근데 지금 여기가 너무 복잡하고 이수현경감을 찾고 있던 중이라 미안하지만 이영 씨와 길게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이수현 경감은 저기 복도 끝 방에 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영은 대답을 하고 서빙을 하느라 금방 사라졌다. 윤이가 오랜만에 보는 이영에게 전처럼 친근하게 대하지 못한 이유는 이영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많이 희미해져 있어서였다. 그것은 윤이가 1 구역에서 일하게 되면서 정보의 접근 권한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기억의 희석 현상이었다. 1 구역 시민들 대부분은 유전적으로 완벽한 인간이었고 미래에 집중하면서 과거의 불필요한 기억들은 다 지워버리는 자기 방어기제를 갖고 있었다. 윤이가 주사장 방으로 가면서 이영과 준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지만 많이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어서 들어와요.” 주사장의 방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있었다. 윤이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김준호박사가 나와서 윤이를 맞아 주었다. 방안에는 이수현경감과 제니스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미 주사장은 죽었지만 주사장의 얼굴을 그린 커다란 그림이 문 앞에서 보이는 정면의 벽에 걸려있었다. 주사장의 얼굴은 아주 젊어 보였다. 


“친구는 어디 갔나요?” 준호가 윤이에게 아는 척을 하면서 물었다.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와도 괜찮은 건가요? 저는 이영 씨가 여기 이수현 경감님이 있다고 알려주셔서 왔습니다. 경감님, 잠시 저랑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있어요. 우리가 처음 본 사람도 아니고 친하게 지냈던 사이인데 벌써 다 잊은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경감님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윤이는 어렴풋이 준호의 연구실과 회의실 모습들이 떠올렸지만 오래된 꿈처럼 장면들이 몇 조각 지나갈 뿐이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일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세요. 지금 밖에 나가면 더 시끄럽기만 하니까요.” 윤이는 이수현경감 옆으로 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재영이가 이곳의 주거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하는데 케이씨가 동행하며 도와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재영 씨가 여기 있는 동안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케이와 같이 돌아다녀도 됩니다.” “그러면 다행이군요. 저는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네요.” 윤이는 이수현경감과 대화를 마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이 씨의 친구분이 우리 직원 이영 씨와 동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니스가 윤이에게 말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호의를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방에 가서 쉬어야겠어요.” 윤이는 김준호박사와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서둘러 방을 나왔다. 윤이는 이유 없이 본능적으로 그와 같이 있는 것을 피했다. 


13.1 

케이는 재영의 뒤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재영은 케이의 바로 앞에서 두리번거리며 걷고 그리고 그 옆에는 이영이 있었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주거 지역입니다. 그전에 저 건물을 보러 가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영은 낮고 둥그런 지붕과 네모난 벽이 서로 기대듯이 조화를 이루는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노이라는 조각가가 지은 미술관이군요. 중립인간시대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미술품들을 전시하고 구경하던 곳이죠.” “네, 그동안 미술관은 많이 봤지만 3 구역에서는 처음 봅니다. 그런데 케이가 사람들을 중립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외인데요.” “중립인간이란 욕망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로써 마지막 철학자 이안폴터가 만든 말입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해서 쓰지 않지만 역사를 구분할 때 쓰기에는 편합니다.” 케이는 다시 자신의 지식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앞에 걷고 있던 재영은 미술관으로 빨리 들어가기 위해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이영은 원하지 않았지만 재영이 앞서 걸어 나가는 바람에 케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케이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중립인간시대가 낯설면 표준화시대라고 하는 것도 타당은 표현입니다. 중앙정부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정돈되기 시작했죠.”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재영 씨가 너무 앞서 가고 있습니다.” 이영의 재촉은 케이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중단했다.


재영은 이미 미술관의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영과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잔디밭과 나무들이 있었다. 잔디밭은 관리가 되지 않는지 대부분 무성한 잡풀로 덮여있고 나무들도 일부는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는 건물로 나옵니다.” 케이가 재영의 옆으로 가서 건물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저 건물은 아무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미술관이 폐쇄된 뒤에는 창고로 쓰이다가 지금은 비어있습니다.” “이 건물은 하나의 예술 작품입니다. 우리 아버지도 이 건물 내부를 돌면 예술적인 영감이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믿지 않았지만 오늘은 한번 같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정말 예술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을겁니다.” “좋은 제안입니다. 예술인들의 언어나 문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이 건물은 그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줄지도 모릅니다. 어서 들어가 봅시다.” 재영은 미술관 건물의 입구 쪽으로 먼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멈추세요.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에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앞에서 가겠습니다. 제 뒤를 따라오세요. 그리고 이 건물을 다 구경하고 다시 나올 때까지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지 마세요. ” 케이가 재영을 앞지르면서 말했다. 재영과 이영은 순순히 케이의 뒤를 따랐다. “여기가 입구이군요.” 복도 한쪽이 길고 하얀 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벽의 중간에는 빛이 들어오는 네모난 구멍이 있었다. 거기서 나오는 빛이 바닥을 비추고 그 네모난 빛이 안으로 걸음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네요. 이렇게 환하고 따스한 곳인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재영은 계속 감탄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는 주변을 스캔하고 경계하느라 바빴고 이영은 그저 묵묵히 그들 옆에서 머물렀다. “저기 왼쪽에 복도가 보입니다. 저쪽으로 가면 됩니다. 이곳은 긴 복도와 안쪽의 네모난 공간이 위로 칭칭 감고 올라가는 구조입니다. 올라가면서 네모난 공간에 전시품들이 채워졌고 복도를 통해서 빛이 들어옵니다.” 케이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케이, 미안한데 잠시 설명을 멈춰주시겠어요. 그냥 돌아다니면서 느끼고 싶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숙소로 돌아가서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재영은 케이의 설명을 저지했다. “알겠습니다.” 케이는 의외로 재영의 말에 별다른 거부를 나타내지 않았다.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살짝 오르막 길이었다. 복도 끝의 왼쪽에는 네모난 공간이 나왔는데 거기는 먼지 쌓인 나무 의자들 몇 개 있었다. 천천히 그 공간을 지나 반대쪽의 복도가 시작되는 곳으로 갔다. 왔던 것과 거의 같은 긴 복도가 또 나왔다. 그리고 또 공간이 나왔고 복도가 나왔고 몇 번을 반복했다. 남아 있는 미술 작품은 한 점도 없었다. 뭔가 지루한 반복이 지속된다고 느낄 무렵 그들은 처음 왔던 입구의 유리벽 빛을 환하게 맞이하는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다. “믿을 수 없지만 우리가 들어왔던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왔네요. 신기한 구조네요. 건물 설계도를 보지 않고도 이해하려면 한번 더 들어갔다 오면 이해가 갈듯하네요. ” 재영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케이는 그런 재영의 마음을 금방 이해했다. “원한다면 제가 같이 다시 들어가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는걸요.” “이영 씨는 어떠신가요?” “저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두 분이 갔다 오세요.” 케이와 재영은 다시 좁은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13.2 

이영은 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바닥에 만드는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케이와 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영은 조금 전 제자리에 맴돌듯이 비슷해 보이는 복도와 방을 몇 번 돌다가 나왔을 뿐이었다. 예술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건물 안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건물 내부에 사람들의 온기는 하나도 없고 제대로 놓여 있는 가구도 없었다. 하지만 이영은 가슴이 따뜻하고 뭔가 하고 싶은 말들이 생겨났다. 말로 표현하자면 어떤 말일지는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았지만 이영은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참 답답했고 이제까지 이영이 느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답답한 가슴을 구부려 가만히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바닥의 먼지를 쓱 긁었다. 직선으로 그리고 사선으로 선을 그렸다. 이영은 선을 그리는 것에 몰두해서 쪼그리고 앉아 자리를 옮겨 가면서 바닥에 선을 그렸다. 선을 그리는 것에 얼마쯤 몰두해 있을 때 케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하시는 건가요?” 이영은 꿈이라도 꾼 듯이 어렴풋이 들리는 케이의 소리를 듣고 자기가 무엇을 했을까 속으로 자신에게 질문해 봤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너무 오래 있다 나와서 죄송합니다.” 재영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제야 이영은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일어났다. “아, 그냥 시간이 남아서.” “이건 선들의 집합이네요. 무엇 때문에 이런 선들이 필요한 거죠.” 케이는 아무리 봐도 그 선들이 수학적인 계산을 위한 것도 아니고 쓸모없어 보여서 다시 물었다. “그냥 먼지를 닦은 건가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여러분을 기다리면서 시간이 남아서 저도 모르게 그렸습니다.” 이영은 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하지 못해서 답답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한결 홀가분해져 있음을 느꼈다. 


“케이, 먼저 앞장서서 가겠습니까? 저는 뒤에서 이영 씨와 같이 케이를 따라가겠습니다.” 미술관을 나오자 재영은 이영과 나란히 케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예술인들이 대대로 살아온 주거지역이라고 해서 다른 주거 지역과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특별한 점이라면 거리에 몇몇 노인들이 집 앞에 나와서 조용히 앉아 있는 게 보일 뿐이었다. 어딘지 그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잠을 자고 있는 듯이 무표정했다. “여러 나라의 주거 지역을 가봤지만 여기도 별 다른 점이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곳도 그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까요. 조상들의 유전자와는 상관없이 이제 이곳 사람들은 그저 3 구역의 시민일 뿐입니다.” 케이는 뒤에서 재영과 이영이 하는 대화를 들으면서 걸었다. 그가 특별히 경계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요소들은 주변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흥지역과는 달리 이곳은 낮 시간인 데도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집안에서 사람들이 무심하게 창 밖으로 케이의 일행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힘쓰는 일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이곳 사람들이 하는 일은 그저 과거 조상들을 따라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예술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이제는 조상의 복제품을 만들어 낼 뿐 새로운 자신만의 것을 창조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기 서서 이곳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싶군요.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재영이 이영에게 한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할아버지는 작은 키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점퍼의 주머니에 한쪽 손을 넣고 서 있었다. 그의 집이라고 하기에 그가 서있는 장소는 집과 공원의 중간쯤이어서 산책을 나온 노인으로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범죄이력도 없고 큰 병을 앓고 있지도 않습니다.” 케이는 뒤에서 재영의 소리를 다 듣고 즉각 노인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표정은 굳어있지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키가 작고 몸매도 평균보다 뚱뚱한 것을 보면 배우는 아닌 것 같고 손이 몹시 크고 굳은살이 많네요. 상처도 많고요. 손으로 공예품을 만드는 공예가 이거나 조각가가 아닐까요?” 재영은 자신의 상식을 동원해서 할아버지의 직업을 유추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영은 재영의 그런 논리와 관찰력에 깜짝 놀랐다. 재영이 말한 대로 그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목각 인형과 탈을 만든 사람이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기서 누굴 기다리시는 건가요?” 이영이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피했다. “저는 연극배우 딸이고 이 사람들은 제 친구들입니다. 할아버지랑 같이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제 친구들이 할아버지의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합니다.” 이영의 설명을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드디어 고개를 들어서 이영과 일행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할아버지의 피부는 주름은 많이 없지만 햇볕에 그을린 듯 어두웠다. “내가 하던 일은 이제 거의 하지 않아. 그리고 예술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나는 할 말도 없어요.” 할아버지는 아직도 완전히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고 이영에게 이야기했다. “그냥 아무 이야기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셔도 됩니다. 여기 나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계셨던 것 아닌가요?” 뒤에 있던 재영이 나서며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아무거나 하세요. 같이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우리 이야기를 들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가면 안 될까요?” 할아버지는 재영의 말을 듣고 잠자코 서있었다. 사실 지금 이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재영이 말했듯이 잠시라도 혼자가 아닌 것뿐이었다. “그럼 우리 집에 들어와요.” 노인은 무심히 말하면서 성큼성큼 집으로 걸어가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재영은 주저 없이 노인을 따라 들어갔고 케이와 이영도 그 뒤를 따라갔다. 노인의 집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노인의 작품인지 벽과 바닥에 꽤 많은 크고 작은 조각들이 놓여있었다. 노인은 식탁 의자에 앉았고 재영에게도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여기는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다 노인들 뿐이요. 하루 종일 밖에 나가서 사람들이 지나가나 보고 있어도 하루에 한 명도 볼까 말까 하지.” “저기 저 돌이나 나무 들은 다 할아버지가 만든 건가요?” “할 일이 없을 때 그냥 만들었지만 이건 그냥 쓰레기야. 전에는 같이 만드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 몇몇 있었는데 이제는 다 떠나거나 죽어서 나만 남았어요. 나는 일을 안 해도 중앙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살아가는데 우리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일을 해야 했어. 돈이 안 되는 일이지만 본인들이 만든 판화나 나무 조각품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지. 나는 흉내를 낼 뿐이지. 이제는 정말 만들고 싶은 것도 없고.” 노인은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계속 중얼거렸다. “저기 놓인 작품들은 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건가요? 제가 좀 둘러봐도 되죠?” 재영은 방안의 벽 쪽에 쭉 둘러 세워져 있는 조각품들을 보았다. 모두 작은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인데 무슨 형상을 만든 것인지는 대부분 알 수 없었다. “적당한 기계가 없어서 그냥 내가 만들다가 포기한 것들이 많아. 옛날에는 큰 돌을 깎아서 만들기도 하고 사람 키보다 더 큰 작품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 사람들을 만나야 되는데 여긴 사람들이 없어. 예술가는 어떤 영감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야.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고 뭘 느낄 수도 없고 손은 점점 힘이 빠지고 느려지고 눈에 보이는 것도 흐려지고 없고.” 노인의 중얼거림은 그의 조각품들처럼 방 안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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