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
우리 집은 대문을 들어가면 돌계단이 나왔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니은 자의 마당과 기역자의 집이 나왔다. 왼쪽으로 현관이 보였는데 현관의 옆으로 니은자 마당의 끝에는 배나무가 있었다. 봄이 오면 마당의 구석에 있던 배나무에 팝콘 같은 하얀 꽃들이 가지마다 달렸다. 내 착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꽃의 가운데 수술은 분홍빛도 돌았다. 달은 항상 배나무 뒤에 떠서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는 배나무 꽃이 전설을 불러오고 귀신도 불러올 것 같아 무서웠다.
봄이 지나 살짝 더워지면 마당 한가운데 있던 라일락 나무에 올라가 반쯤 누워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무는 너무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지가 얇지도 않았다. 마당의 가운데에 담 쪽으로 자리 잡은 라일락 나무는 압도적으로 키가 크지도 않았지만 듬직했다. 적당히 와이자로 벌려진 나무 가운데를 올라가 등을 대고 반대 가지로 다리를 올려놓고 앉으면 소파보다 편했다. 배나무처럼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지가 가늘지도 않아 심심할 때 다정한 친구가 돼준 라일락 나무였다.
나와 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신기했던 건 포도나무였다. 우리 집의 입구에서 보면 가장 안쪽에는 집안의 거실에서 문을 열면 바로 나올 수 있던 시멘트 바닥의 네모 반듯한 마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있었다. 나무라기보다는 덩굴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아무튼 산신령 지팡이 같이 휘어지고 울퉁 불퉁한 등나무는 마당 위로 만들어진 쇠기둥을 휘감아 타고 올라가 그늘을 만들어 줬다. 그 옆에 한편으로 벽 쪽으로 포도나무가 가지를 뻗어 올라갔는데 평소에는 존재를 몰랐다.
잎이 넓적한 포도나무는 등나무보다는 무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여름이 되면 녹색의 자그마한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만들어 내곤 했다. 포도가 셔서 안 먹는 나로서는 그다지 신기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가끔 그 포도넝쿨 밑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올려다보면 작은 녹색 보석이 아름아름 달려있곤 했다.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신맛을 느껴 얼굴을 돌렸다. 시간이 흐르면 그 녹색의 불투명한 포도송이는 까맣게 변했고 알은 작았다. 가을이 되면서 포도알들이 바닥에 떨어져서 검은색의 점을 만들곤 했다.
내가 나라는 의식을 갖기 시작한 후부터 중학교 가기 전까지 유년 시절 내 취미는 마당을 거니는 것이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와서 노는 그 시간이 가장 평화롭고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마당에서 자전거를 타던 개미를 관찰하던 아니면 그늘에 누워 상상을 하던 나를 지켜봐 주고 내 마음을 알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준 것은 마당의 나무들이었다.
나는 나무를 꽃보다 사랑했다. 담벼락을 타고 가득 피어나던 붉은 장미보다 화단에 가득 피던 다양한 색깔의 분꽃보다 나무가 좋았다. 나는 나무를 보고 꿈을 꿨다. 그건 우리 집 바로 옆 골목의 전깃줄에 한가득 앉아 있던 참새들도 알고 가치나 까마귀도 알고 있었다. 학교를 갔다 오면 훌쩍 키가 큰 나무들이 말없이 나를 반겨 주고 나의 일상에 소소한 위로를 보내주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공부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시기였는지 평화로운 나만의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 기억나는 건 쌀쌀한 봄날에 대문 앞에 있던 목련 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던 장면과 감나무에 감들이 달려있던 가을날정도다.
다시 내가 나무나 숲을 의식하게 된 것은 대학에 가서였다. 나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느 지도의 도시를 헤매는 영혼이었다. 학교 주변에 작은 숲이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 기숙사 뒤편이었는데 거기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기숙사 방에서 창문을 열면 숲에서 나는 나무 소리가 들렸다. 바람소리와는 다른 소리였다. 사르르 거리는 나뭇잎들의 소리였다. 하지만 그때 겨울과 봄이 길었다.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곧게 뻗어있었고 세찬 바람 소리만 들리는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나는 몇 번의 긴 겨울과 차가운 봄을 보냈다. 둔감한 나는 몇 번의 사이클을 보내고 그제야 알아챘다. 봄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며칠이 그렇게 반복되면 공기가 점점 따뜻해지고 나무는 하룻밤 새 초록의 잎을 눈부시게 발산했다. 언제 나무에 잎들이 무성해질지 조급해할 필요도 없었다. 순식간에 나뭇잎은 무성해졌다. 그러면 나무는 다시 사르륵하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연초록의 잎을 품은 나무 때문에 오월이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도서관 옆에는 분수가 있고 나무 그늘이 있었다. 시험이 다 끝나가는 오월이었다. 나는 딱딱한 돌의자에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너무 파랬다. 바람은 내 머리칼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부드럽고 상쾌했다. 그리고 나무가 스르르 소리 내어 말했다. "때가 되면 너는 네가 될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오래도록 이 장면은 머릿속에 남아서 지루하고 답답한 내 일상을 지탱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