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은 현실_위로받는 죽음
어린 시절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친구가 결석을 했다. 선생님은 나중에 친구가 오면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에게 죽음은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며칠 뒤 어머니가 돌아가신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나타났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그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나는 그저 모른 척 그냥 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위로하는지 몰랐다.
그 후로 시간이 더 흘러 나는 내 밥값을 버는 성인이 되었다. 신기한 것은 성인이 되고 나니 죽음이 생각보다 늘 가까이 있었다. 친한 친구와 가족의 죽음도 있었다. 처음이 어렵지 점점 죽음에 무뎌지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이었다. 추석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문득 시간이 나서 아는 지인들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한 선배에게도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별로 안 좋았다.
전화를 끊을 때쯤 선배의 사무실 근처에 갈 일이 조만간 있는데 연락해서 보자고 했다. 그제야 선배는 자기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입원한 병실에 곧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추석이 오기도 전에 선배는 서둘러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장례식장에 가니 활짝 웃는 영정 사진이 반겨줬지만 슬프기만 했다.
언젠가 내가 아침마다 읽던 책이 있었다. 조금씩 읽지 않으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워서 그렇게 읽어야 했다. 그렇게 읽은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서 딱 하나 기억에 남은 문장이 있었다. 자신의 소설을 인용한 부분이었는데 소설의 여자가 장례식에 가서 눈물을 흘린 이유가 삶의 엄숙함을 깨달아서였나 그런 식으로 써놓은 문장이다. 정확히 글로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 문장은 그저 느낌으로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는 서로 운명이 같다. 결국 죽는 결말이다. 인생은 꿈같이 짧고 허무하다." 그걸 확인하는 본능적인 슬픔이 깔려있다.
오래전 대학을 다닐 때 시나이 마운틴 병원이 학교 근처 동네에 있었다. 무슨 이름인지 모르고 그 앞을 다니면서 이름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게 성경의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해서 헤매던 광야에 있던 산이란 걸 알았다. 사막이나 광야를 헤메 보지 않았으니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시나이반도를 직접 여행한 니코스카잔차키스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히브리인들은 신을 무릎 꿇게 하고 신은 내편이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중해 기행문에 썼다. 아직도 신은 인간에게 유효하다.
며칠 전 내가 팔로우하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웨스티 강아지가 죽었다. 나무상자에 담긴 강아지 유골함과 환하게 웃으며 모래사장을 뛰는 사진이 촛불과 함께 주인의 장식장위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슬픈 건 바로 전날까지도 개모차 타고 산책 다니던 사진이다. 그때까지 주인도 그게 마지막 산책이었는지 몰랐다고 했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강아지의 죽음이 슬픈 건 가까이 지낸 존재였기에 그렇다.
무리 지어 사는 동물들은 아프거나 병들면 공격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무리를 떠나 숨어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 내가 어릴 적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왔던 강아지도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니 사라졌다. 평소 집 마당에서 놀다가 동네도 들낙 거렸지만 항상 집에 돌아오던 강아지였다. 할머니는 강아지가 노쇄해서 죽을 때가 돼서 알고 나간 것 같다고 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삶의 이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강아지였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도 혼자 잘했을 것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법에서 줄리언반스는 중세시대에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살인한 돼지나 동물을 재판에 회부해서 과실을 따졌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잔인해졌다고 썼다. 규격화된 품질관리로 잘 포장되어 진열되어 있는 돼지에게서 나 또한 상품이상의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니 그럴만하다. 모든 죽음은 본능적으로 슬프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슈퍼에 진열되어 있는 돼지의 죽음은 죽음이라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동물의 죽음이 잔인하고 사육 때문에 환경이 파괴돼서 등등의 이유로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온갖 약물을 투여해서 기른 뒤에 죽이고 번듯하게 포장해 놓고 사 먹는 것은 똑같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지구 위에 공존하는 모든 생명체중에 온 힘을 다해 살아남고자 꿈꾸지 않은 것은 없다. 수육이 되어버린 돼지에게도 김치가 되어버린 배추에게도 생존은 절실한 거였을 거다. 그들에겐 장례식도 영정사진도 없지만 문득 요즘 같은 날에는 그들도 나와 공존했던 지구 위의 생명체였구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