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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Oct 22. 2023

오래된 건물 한 귀퉁이

소설 같은 현실_가을

나는 창가에 앉아 노을이 하얀 구름 뒤로 퍼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 너에 대한 기억이 네 겹의 두꺼운 종이 박스를 관통해서 하나의 장면으로 만들어졌다. 


정면에는 양쪽으로 붉은 낙엽이 떨어져 있는 보행자 통로가 있고 그 길의 왼쪽에는 붉은 벽돌과 녹색의 양철 지붕으로 된 오래된 건물이 있다. 삼층이나 사 층쯤 되는 낮은 건물이다. 낙엽은 사람이 발을 딛고 걸을 수 있을 만큼 치워져 있어서 오솔길 같은 느낌이 난다. 오른쪽으로는 오렌지빛과 붉은빛이 맴도는 낙엽이 물든 가로수 나무가 있다. 그리고 찻길에는 주차된 차 이외에는 차가 없는 텅 빈 아스팔트 길이 있다. 정말 길은 저 뒤쪽부터 텅 비어있다. 그리고 그 길 끝으로 지평선 위에 하늘이 보인다.

 

가을이 막바지에 다다르면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하늘이 나온다. 푸른 하늘은 여름에서 가을로 지나는 길목에 나오는 것이고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는 하얀 하늘이 나온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낮에는 분부신 햇살이 방안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다. 그렇다고 비가 오려는 그런 어두운 날도 아니다. 그런 애매한 밝기의 하늘만큼 바람도 그렇다. 늦여름 태풍이 몰아칠 때의 그런 사나운 바람이 불지도 않는다. 하지만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아니면 가까운 거리를 걸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갈 때 문득 목이 차가워서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카로움이 있는 바람이다. 


이런 계절의 이런 날들이 다가오면 그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알기까지 세월이 흘렀다. 내가 무엇을 느끼며 사는지 이제야 알았다. 하얀 하늘은 며칠이 지나면 먹구름을 부른다. 하얀 구름과 검은 구름이 느리게 때론 빠르게 서로 스쳐간다. 그리고 올 듯 말 듯했던 차가운 비가 몇 번 내린다. 그때 아름답던 낙엽은 본질만 남기고 모두 커다란 녹색의 쓰레기차 속으로 사라져 간다. 


매일을 살고 있던 나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보게 된 후에는 문득 그런 게 보인다. 그건 너무 급하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모두가 맞이하는 사라짐의 시간일 뿐인데 세월이 이만큼 흘러야 보인다. 그래서 마지막 잎새라는 별로 슬프지 않았던 이야기가 이제는 조금 슬퍼지게 된다. 감사하다는 말을 오늘과 지금에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언지 알게 된다.  


요즘 산책 길에서 마주치는 꼬리가 짧은 조그만 갈색 푸들이 마주하는 세상은 냄새로 가득 차 있다. 요즘 나의 그것은 색깔로 가득 차있다. 나는 매일 푸들보다 더 신이 나서 킁킁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거리의 색들을 눈에 담는다. 요즘 나뭇잎들은 요정처럼 움직인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온통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아직은 완전히 노랗지 않은 은행나무잎도 그렇다. 


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세월은 붉은 낙엽이다. 반쯤 물든듯하다가 갑자기 붉어지고 떨어져 사라진다. 나는 녹색 양철 지붕과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오래된 건물 한 귀퉁이와 텅 빈 찻길의 중간쯤이다. 머무는 듯 머물지 않는 듯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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