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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5. 2023

남애항 고양이와 할아버지

사라지는 등장인물

오늘은 날이 참 맑다. 배를 타고 먼바다에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물을 당길 힘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대신 나는 늘 하던 대로 낚싯대를 들고 항구와 해수욕장 사이의 바다로 간다. 바닷물이 닿지 않는 튀어나온 바위를 찾아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 바다 가까운 쪽으로 걸어간다. 오늘따라 다리가 떨리고 힘이 없어서 얼마가지 않았다. 그래도 바다 가까이 오니 가슴이 시원하다. 등대 앞으로 빨간 낚싯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게 보인다. 이미 해는 하늘 높이 떠올랐다. 저 배는 만선이어서 늦게 온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바라본다. 

오늘은 유난히 파도가 잔잔하다. 물론 파도가 조금 거세도 여기 항구와 해수욕장 사이의 방파제 뒤의 휘어진 공간까지 들어오진 않는다. 나는 잔잔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위 위에 앉아서 거친 파도를 헤치며 그물을 끌어올리던 과거를 본다. 그때 거센 파도와 물살을 거스르며 가득 찬 그물 힘껏 당겼던 나의 젊은 시절을 본다.


원래 이곳은 작은 항구였다. 해수욕장도 작아서 한여름 빼고 사람들은 여기 오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서핑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해수욕장에서 일 년 내내 문을 여는 식당과 카페가 몇 개 생겨났다. 하지만 여기 해수욕장과 항구의 중간에 위치한 바위틈은 아직 나만의 공간이다. 그건 아마도 이 동네에서 돈이 되지 않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일 것이다. 여기서 낚시를 하면 운이 좋으면 몇 시간 만에 금방 바구니를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이고 보통 하루에 한 마리 잡기도 힘들다. 

나는 매일 아침을 먹으면 여기 와서 낚싯대를 담근다. 이건 내가 살아온 과거를 마주하고 나를 보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알게 될 거다. 기억은 참 이상하게도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오래된 과거를 더 또렷이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은 한 달 전이나 일 년 전의 일처럼 그게 그거 인양 뭉쳐서 희미하게 만든다. 어제 내가 뭐 했는지 일 년 전에 내가 뭐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애써 젊어지고 싶지 않다.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할게 많은 노인이 좋다. 바다에 나와 낚싯대를 던지고 과거를 본다. 


나는 이른 아침 해가 뜨기 직전부터 할머니에게 아침밥을 얻어먹었다. 어느 계절이나 할머니는 해가 뜨기 전에 마당에 나와 나를 부르고 밥을 준다. 내가 밥을 다 먹을 때쯤이면 할머니는 집을 나선다. 수산물 직판장에 나가서 생선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려면 새벽에 나서야 한다. 할머니는 나에게 집을 잘 지키라고 인사를 하지만 그건 그냥 하는 말이다. 할머니는 내가 집안에 있는 시간보다 하루종일 동네를 돌아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아침밥을 먹고 마루 밑에 엎드려서 조금 더 잠을 잔다. 할아버지가 마당에 나와 낚시 도구를 챙기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할아버지는 해가 완전히 뜬 아침이 되면 낚싯대를 들고나간다. 나도 그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선다. 집을 나가서 길 옆의 오래된 나무 밑의 정자에 앉아 있는다. 그 정자에 앉아 있으면 오른쪽으로는 바다에서 낚시하는 할아버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항구 쪽에 일하러 간 할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걸 볼 수 있다. 

나무밑 정자에서 어느덧 졸다가 깨었다.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바구니는 비어있는 게 틀림없다. 오늘도 아무것도 낚지 못하고 그저 바다를 보며 앉아있다. 살금살금 할아버지 옆으로 가본다. 할아버지는 내가 온 걸 알고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웃는다. 나는 바위에 쪼그려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듣으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때가 되면 할머니가 돌아온다. 그때까지 한 마리라도 잡으면 좋을 텐데 할아버지 낚싯대에는 아직도 고기 소식이 없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낮잠을 청한다. 바다 바람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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