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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S Sep 03. 2023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도시 스케치_런던 2

나는 환경에 예민해서 여행을 가면 잠을 못 잔다. 하지만 굉장히 빠른 적응력을 갖고 있다. 둘째 날부터는 잘 자는 편이다. 런던으로의 긴 출장은 그곳에서도 나름의 생활 루틴을 갖게 만들었다. 평일 퇴근 후에는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박물관을 가던가 뮤지컬을 보러 갔다. 대영 박물관은 무료이고 내가 머물던 호텔 뒤에 있어서 매일 산책 삼아 둘러보았다. 뮤지컬은 평일에 캔슬된 표를 구하면 싸게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말에는 걸어서 곳곳을 구경했다.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냥 운동 삼아하는 산책을 했다. 그러나 그 산책은 항상 관광지 구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런던 도심에서는 어디서든 거리를 걸으면 오분 안에 유명한 관광지가 나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런던은 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기 때문에 거리를 걷다가 보이는 다리만 봐도 엽서에 나오는 다리들이었다. 온 동네가 관광지인 런던에서 산책은 하루 종일 걸어도 지루하지 않고 좋았다. 


주말에 시내 산책은 거의 하루 종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주말의 런던 산책 코스는 코벤트 가든을 지나서 차이나타운을 들려 내쇼널갤러리와 트라팔가르광장으로 이어지는 코스였다. 그러고 나서 트라팔가르광장에서 좀 쉬다가 버킹검궁전도 가고 그 앞에 있는 하이드파크를 한 바퀴 돈다. 그리고 강가로 이어진을 길을 따라 빅벤도 보고 국회의사당 건물들도 본다. 강을 건너서 강변길을 따라 테이트 모던을 보고 보로마켓도 보고 돌아오면 저녁 시간이 되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나는 운동 삼아 또 거리를 걷고 있었다. 코벤트 가든에서 내가 자주 가는 젤라토집에 가서 젤라토 하나를 사 먹었다. 케이크와 차를 파는 가게 유리창 앞에서 오늘은 무슨 케이크가 나왔는지 케이크 구경도 했다. 그리고 왠지 복잡하고 냄새가 나지만 활기 넘치는 차이나 타운을 돌아서 내쇼널 갤러리에 갔다. 좋아하는 고흐나 시슬리의 그림을 한번 쳐다보려면 많은 사람들 사이를 휘젖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일요일에는 그나마 사람이 덜했다. 고흐의 그림 앞에는 아이들이 단체로 왔는지 가득 몰려 있었다. 

사람 구경인지 그림 구경인지 모르는 복잡함을 뒤로하고 갤러리를 나왔다. 갤러리 뒤편으로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나는 길이라는 소재를 무척 좋아한다. 사진을 찍을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내 눈에는 사람보다 길이 항상 먼저 보인다.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길과 건물 그리고 하늘이 만나 내 눈에 들어오는 공간이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런 길은 꼭 사진을 찍는 편이다. 


그날도 나는 여기저기 길을 헤매면서 자유롭게 길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다 다리가 아파서 트라팔가르 광장으로 내려가서 계단에 걸터앉아 사람 구경을 하면서 쉬려고 했다. 저 멀리 광장이 보이고 언덕의 골목길에서 내려와 일 미터 앞쯤에 큰길을 만날 찰나였다. 정면으로는 큰 보행도로와 건너편 트라팔가르 광장이 보였다. 그 옆에는 카페 건물의 옆면이었다. 내 눈에 벽 옆에 꽤 괜찮은 모직 양복을 잘 차려입은 노신사가 사각 지팡이를 지탱하여 멀리 바라보며 서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런가 보다 하고 내 길을 가며 그 옆을 지나칠 때 다시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멋진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는데 다시 보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멀리를 쳐다보면서 서있다. 그리고 노인 옆에 백발의 마른 할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냅킨을 쥐고 노신사의 바지 밑에서 구두로 떨어지는 것을 닦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냅킨으로 닦고 한 손으로 닦은 냅킨을 꼭 쥐고 있었다. 뭘 닦고 있는 걸까 하고 다시 보았다. 양복바지 밑을 통해 구두 옆으로 떨어지는 것은 똥이었다. 나는 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그 장면을 봤다. 사람들은 분주히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나와 그 할머니는 잠시 일초정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수많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빨리 그들을 지나쳤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함으로 모든 것이 관광지인 도시 런던에서 나는 그날 한참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런던을 떠나와서도 나는 그 광경에 대해서 잊지 못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노인에 대한 연민 같은 게 아니었다. 같은 인간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연민이었다. 영원히 살 것 같고 미래만 생각하고 살지만 결국 힘없고 나약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과거는 미래가 되고 미래는 또 과거가 된다. 런던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노부부를 마주친 그 화창한 일요일 낮의 그 장면이 영화처럼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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