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나_라일락나무
2023년 4월 초 어느 날
내일부터 이틀간은 계속 비가 온다고 했다. 내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비 오기 전에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나는 저녁노을이 지기 전에 집을 나섰다. 해가 저물고 있지만 낮 동안 더웠던 공기는 아직도 따스했다. 아마도 해가 완전히 저야 선선해질 것 같다.
지난주부터 날씨가 너무 더웠다. 그렇게 며칠 덥더니 나무들이 온통 연한 초록의 잎을 달고 있었다. 그동안 우중충했던 가로수길이 이제는 좀 환하게 보였다. 갑자기 돋아난 나무 잎들에게 도대체 너희들은 언제 그렇게 돋아 난거니하고 묻고 싶었다.
거리는 구름과 미세먼지에 적당히 가려져서 뜨거운 태양도 없고 바람도 적당히 분다. 비가 오기 전에 바람에 섞여서 나는 흙냄새가 있다. 아직 그런 냄새는 나지 않는다. 비구름이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거리를 둘러보며 걷는 내 시선은 신호등을 기다리는 주인과 강아지에게 쏠린다. 저 신호등 앞에는 항상 주인과 강아지 한쌍이 두 번에 한 번은 있다.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오자 강아지와 주인은 길 건너 마트로 가고 나는 마트를 지나쳐 계속 걷는다. 아파트를 지나고 작은 공원을 지나 다시 신호등을 기다린다. 이제 절까지 마지막 신호등이다. 신호등을 지나 몇몇 건물을 지나치고 테니스장과 운동시설이 있는 공원 옆길을 걷는다.
이제 절이 보이기 시작한다. 매번 절 앞에서 엎드려 구걸하는 사람도 보인다. 절 구경을 온 외국인들도 보인다. 나처럼 편한 차림으로 산책 나온 사람은 없다.
내가 너무 오랜만에 온 것인지 절의 뒤쪽으로 산책하는 길에 들어서니 이미 꽃들이 떨어져 길이 하얗다. 그리고 나무들이 연초록의 잎을 틔웠다. 좀 더 오르니 분홍색꽃을 피운 나무와 하얀색 꽃을 피운 나무 그리고 나뭇잎이 달리지 않은 나무도 있다.
숲의 나무들은 모두 같은 환경에서도 다른 나무임을 증명하듯이 같은 계절이지만 상태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전에 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생기가 돌고 있다.
나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흙길을 걸어서 절의 둘레를 걷는다.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길을 만나고 절을 내려다보며 쉬는 휴식 공간도 지나친다. 나에게 휴식은 지금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이 순간이다. 다리는 아프지만 쉬고 싶지는 않다.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살구나무가 있는 기와담 옆으로 간다. 비가 오기 전에 오늘 여기 와보고 싶었던 것은 살구나무를 보고 싶어서였다. 이 절의 한쪽 끝에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은 곳에 조용히 혼자 서있는 살구나무다.
나는 산책을 올 때마다 살구나무를 꼭 보고 간다. 특히 살구나무에 연분홍의 작은 꽃이 피는 봄에는 나무 밑에서 보고 있으면 신윤복 그림에 들어갔다가 나가는 기분이 든다. 몇 백 년은 거슬러 올라가 동네 기와집 담장 옆을 서성거린다.
그런데 분명 이 살구나무는 봄이면 가지와 바닥을 연분홍잎으로 수놓곤 했는데 올해는 꽃잎이 없다. 벌써 며칠사이에 다 떨어진 건지 나무를 자세히 봐도 꽃잎이 하나 안 보인다. 게다가 나무에 잎사귀도 얼마 나오지 않았다. 검은 가지들만 날이 저무는 어두운 공간에서 반짝인다.
살구나무 꽃을 못 봐서 크게 실망을 하고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 걸었다. 오른쪽 멀리에 오래된 지팡이 같은 휘어진 굵은 줄기를 가진 낮은 나무가 보인다. 나무 위에는 보라색 꽃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꽃향기가 기가 막힌다. 양쪽으로 갈라진 나무 기둥은 산신령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같이 신비해 보였다.
저무는 해와 함께 그 신기한 나무 사진을 찍는데 향기가 너무 진하다. 이 나무는 포도송이 같은 꽃을 달고 있다. 어딘가 많이 본듯하다. 라일락이구나 생각하는 순간 어릴 적 내가 올라가 기대앉아 있던 우리 집 마당의 라일락나무가 생각났다.
어릴 적 마당의 라일락 나무는 나에게 봄부터 여름까지 소파보다 편안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 그늘도 만들어주었다. 나의 친구 같았던 그 라일락 나무가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마 살아있다면 그 나무도 이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울창한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왜 이 라일락 나무가 이제야 나에게 보인 것일까? 그동안은 살구나무만 봤는데 라일락 나무를 몇 년 만에 알아보다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마음이 없으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다. 집에 와서 인터넷을 찾아보니 오백 년이나 된 라일락 나무라고 나와있었다.
2024년 4월 중순 어느 날
여전히 미세먼지는 뿌옇고 나무는 연초록의 잎들이 달려있다. 작년에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라일락나무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여행지에서도 라일락 나무를 볼 시기가 지나고 있어서 문득 라일락나무를 몇 번 생각했다. 역시나 이미 꽃이 피었다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초라했다. 꽃이 졌다고 해서 잎들도 가지도 시들 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