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려워지고 있었다. 거리에 나서면 누구의 이마에나 음습하게 드리워져 있는 악몽 같은 기억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한결같이 낯익게만 느껴지는 얼굴들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짙은 피곤함을 보았다. 어쩌다 마주치면 사람들은 문둥이처럼 오그라진 가슴을 숨기고 저마다 실실 눈길을 피해 갈 뿐, 어느덧 모두들 이제는 차라리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이었다. 나는 고향의 그 혼곤한 잠이 싫다고, 무덤처럼 무겁고 내리누르는 한낮의 수면이 두려워졌다고 네게 얘기했다."
임철우의 단편소설 <동행>에서 이 부분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대의 어두운 시대 상황을 그린 이 소설이, 지금의 우리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는 돌고 돌아 반복된다고 하지만, 오래전에 나온 소설에서 언급된 그 당시와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씁쓸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혼란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언론은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온통 같은 소식으로 도배를 하고 있다.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이러다가는 이 상황에 익숙해져, 어느 순간 체념 비슷한 것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문득 피로가 몰려왔다. 불면증 때문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위기와 혼란 속에서,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개개인들이 점점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2024년은 이렇게 지나가는데, 우리는 한동안 2024년을 붙잡고 놓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우리에게 2025년 새해가 올까? 새해를 앞두고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지만, 솔직히 막막한 마음이 드는 건 과연 나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