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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랑에 관하여 ㅡ 체호프

by 서영수

안톤 체호프의 단편 <사랑에 관하여>에는 지인의 부인과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설사 알았다고 해도 그녀(안나)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였기에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주인공 알료힌의 애절한 사연이다. 그는 안나를 보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정확히 어떤 매력이 있었는지, 그녀의 무엇이 그토록 제 마음에 들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그날 그 식탁에 앉아 있던 저에게만큼은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젊고, 아름답고, 착하고, 지적이고, 매혹적인 여자를 만난 겁니다. 곧바로 저는 그녀에게서 가깝고도 낯익은 존재를 느꼈어요. 그 얼굴과 다정하고 총명한 눈을 언젠가 어린 시절 어머니 서랍장 안에 있던 앨범 속에서 이미 본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


그때가 이른 봄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여름 내내 소피노에서 두문불출하며 일하느라 도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만, 그런 나날들 속에서도 날씬한 금발 여인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제가 그녀에 대해 일부러 생각했다기보다, 마치 그녀의 옅은 그림자가 제 마음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일부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가깝고도 낯익은 그래서 어디선가 본 듯한,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이 나를 덮고 있는 것 같은 충만함. 알료힌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서로의 감정을 숨긴 채 시간을 보내던 중, 안나는 신경쇠약에 걸려 요양을 위해 크림 지방으로 떠나야만 하고, 두 사람은 열차 안에서 마지막 이별을 맞이한다. 체호프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는 작별을 해야 했지요. 객실 안에서 시선이 마주친 순간 우리는 둘 다 자제력을 잃고 말았어요. 제가 그녀를 끌어안자, 그녀는 제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녀의 얼굴에, 어깨에, 눈물로 젖은 팔에 입을 맞추며 ㅡ 아, 우리는 얼마나 불행했던가요! ㅡ 사랑을 고백했어요. 심장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하잘것없고 기만적이었는지를요. 사랑을 할 때는 행복이나 불행,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죄악이니 선행이니 하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중요한 것에서 출발하여 그 사랑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혹은 아예 판단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랑 앞에서는 도덕도, 윤리도, 선악에 대한 판단도,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조차도 모두 힘을 잃는다. 사랑은 그런 판단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쏠림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알료힌이 깨달은 이 진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세상이 요구하는 이런저런 잣대나 기준에 휘둘려 살아왔으니 통증이 없을 수가 없었다.


체호프는 말한다. 사랑에 대해 오늘날까지 언급된 유일무이한 진리는, 바로 그것이 '위대한 신비'라는 것뿐이며, 그 밖에 사랑에 대해 쓰이거나 말해진 모든 이야기는 어떤 결론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는 문제들을 새삼스럽게 제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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