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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또다른 친밀함의 표현

by 서영수

내가 다른 누군가를 안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함께 살아가는 가족, 특히 가장 가깝다는 배우자에 대해서조차. 나도 나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데, 남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교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막상 갈등이 생기면, 마치 그 사람을 다 아는 것처럼 큰 소리를 치곤 한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요일 아침, 존 밴빌의 <오래된 빛>을 읽었다. 오늘이 대출 만기라 어떻게든 다 읽어야 한다. 갑자기 압박감이 밀려왔다. 사실 지난주엔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물론 핑계에 불과하지만. 오늘은 이 부분(207 - 208p)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내가 평생 알았던 모든 여자 가운데 리디아를 가장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이 들자 발을 멈추게 된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이 긴 세월을 수수께끼와 함께 산 것일까 ㅡ 내가 만든 수수께끼와?


어쩌면 그저 그녀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아주 오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애초에 우리에게, 즉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은 만큼 그녀를 알아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내가 이제는 그녀를 제대로, 원근법에 따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말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주 멀리까지 함께 걸어왔기 때문에 그녀가 나와 합쳐진 것일까? 가로등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점차 그와 합쳐지다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처럼?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전에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어느 누구의 생각도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 바로 그거다, 아마도. 그녀는 나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나의 모든 수수께끼 가운데도 가장 큰 것, 즉 나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싸우지 않는다, 이제는. 전에는 지진을 일으킬 듯 싸웠다. 몇 시간에 걸쳐 격렬하게 터뜨리고 나면 우리 둘 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잿빛이었고, 격분해서 말을 잃은 리디아는 분노와 좌절 때문에 눈물이 투명한 용암의 냇물처럼 빰을 타고 흘러내렸다. (...)


우리는 계속했다. 서로 할퀴고 찢었다. 눈물이 그치거나 우리의 뜨거움이 식지 않도록. 그러다 마침내 진이 다 빠졌고, 아니면 너무 늙어버렸고, 그래서 내키지 않은 휴전에 이르러 요즘은 이따금 소형 무기를 발사할 때만 짧고 미지근하게 휴전이 흔들릴 뿐이다.


따라서 이것이, 내 짐작으로는, 내가 리디아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된, 그녀를 아는 걸 그만두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다. 싸움은, 우리에게는,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주인공은 고백한다. 자신은 리디아를 평생 사랑했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너무 오랫동안 너무 가까이 있어서, 이제는 제대로 된 거리감으로조차 바라볼 수 없다고. 마치 가로등 아래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결국 자신과 하나가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그에게 리디아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이해 불가능한 '자기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그 고백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오래 맴돈다. "싸움은, 우리에게는,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오랜 시간 격렬하게 부딪치고, 상처 주고, 진이 빠지도록 싸우다가 결국 내키지 않는 휴전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싸움이 친밀함의 표현이라니?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 싸울 일조차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늘 싸우듯,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과도 싸울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딪히고,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알아볼 수 없는 거리. 그 안에서 우리는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 가끔은 잠시 멀어졌다가도 다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해하려는 몸짓, 싸우고도 돌아보는 그 마음에서 진짜 친밀함이 깃드는 건 아닐까. 리디아라는 수수께끼는 어쩌면 주인공의 고백처럼,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린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와, 아니 나 자신과 완전히 화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싸움 속에서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 그게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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