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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17. 2021

극한 상황 속에서 피어난 사랑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각자 자신의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을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용감해지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며 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_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전쟁과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 하게 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의지할 사람도, 살 집도 없는 형편이라면, 평범한 일상에서 하는 사랑과는 다를 것 같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감시와 견제가 일상화되었다면 감정 표현도 섣불리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어려운 때이니 서로에 대한 사랑은 더 애틋할 것만은 분명하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으로 참전한 주인공 에른스트 그래버가 러시아 전투 중에 휴가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전장은 러시아지만 독일 역시 공습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치의 감시와 통제는 점점 더 심해지고 사람들은 모든 일상에서 극단적으로 제한을 받게 된다.


그래버는 부모를 찾다가 우연히 만난 동창생 엘리자베스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게 되지만, 다시 전장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무고한 러시아 포로를 돕다가 결국 엘리자베스와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 극한 상황에서 그것도 짧은 2주간의 휴가 기간 동안의 사랑이라 그런지 그들의 감정이 더 농밀하다.



이 소설은 반전소설이다. 그래버와 엘리자베스의 사랑 이야기가 주된 축을 이루고 있지만, 소설의 대부분은 전쟁의 비극과 참화, 그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비인간적인 행태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래버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게 된 거는 사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게 될 경우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엘리자베스에게 수당을 받을 수 있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배려하는 그래버의 마음이 뭉클하다. 어려운 때일수록 오히려 사랑은 빛이 난다. 어떤 이들은 상황으로 인해 사랑이 꺾이지만, 어떤 이들은 사랑이 더 견고해지기도 한다. 상황이 영향을 미치지만 때로 상황을 극복하는 게 인간이다. 상황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면.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 인간성의 상실, 절망 등을 묘사함으로써 다시는 전쟁이라는 비극을 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 등과 같이 전쟁소설에 천착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 역시 저자의 전작의 분위기를 충분히 계승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래버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전쟁 속에서 이어가야만 했던 그들의 사랑은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작가는 그래버의 내심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스름 속에서 이리저리 이어졌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리고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말을 벗어나 있어서 그것에 대해 말할 수도 없었다."


사랑하게 되면 상대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게 된다. 에로틱한 감정은 잠시고, 결국 사랑은 내가 없어지고 상대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사랑이 영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걱정이 자꾸 생기는 법이야.”



레마르크의 전작인 <개선문>에서 보았듯이, 작가는 인간의 삶에 대해 냉소적이다. 아마 그가 인간의 심성과 감정을 정확히 알고 구체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일지도. 삶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전제로 한 작가의 말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경청해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 교만했어. 피투성이 과거를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는 현재를 성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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