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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21. 2022

나의 느림이 너에 대한 배려가 되기를

나의 해방일지/느림보

어제는 그제 밤에 잠을 자지 못해 하루가 무척 피곤하고 길게 느껴졌다. 어찌어찌 집에 돌아와 오늘은 일찍 자야지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은 보기 싫고 잠깐 시간을 내서 봤던 게 <나의 해방일지> 9화. 주인공 구씨가 염미정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미국에 유명한 자살 절벽이 있대. 거기서 떨어져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터뷰를 했는데, 하나같이 하는 말이 2/3 지점까지 떨어지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던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는 거야.


몇 초전까지만 해도 죽지 않고 살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발을 뗐는데 몇 초만에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끼게 된다는 거지. 그래서 말해줬어. 사는 걸 너무너무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절벽에서 다 떨어지지 말고 2/3 지점까지만 떨어지라고."

너무 힘들면 그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거다. 그렇다고 죽는 것도 쉽지 않다. 정말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죽을 만큼 괴로운 거니까. 그게 마치 죽고 싶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그래서 나는 ‘죽을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죽기 살기로 ~하겠다’는 등 죽음을 운운하며 뭘 하겠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목숨을 끊을 만큼 엄청난 일이나 사건은 없다.


막상 죽으려고 행동에 옮기면 삶에 대한 미련이 밀려와 다시 생을 붙잡게 된다. 죽을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차라리 살라고 하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게 아닐까.


그래도 얼마나 힘들면 죽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는 살기 바빠서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누가 자살했네 하는 소식은 내 일이 아니니 흘려듣고 만다. 당연히 염려나 걱정은 의례적인 인사치레에 그치고, 그 사람의 마음 깊이 숨어 있는 고민이나 어려움을 내 문제처럼 헤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울하고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가족이든 친구든 주위의 누군가에게 "나 지금 많이 힘들어. 괴로워. 도와줘."라고 용기를 내 손을 내밀라고 해야 한다. 누군가는 그가 내민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어야 하고, 그 누군가는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9화 마지막에 엔딩 뮤직으로 나오는 곡이 신유미의 <느림보>, 서정적이면서 여운을 주는 기타 사운드가 매력적인 곡이다. ‘싱어게인2'에서 뛰어난 가창력을 보여준 신유미의 보컬이 곡을 한층 완성도 높게 만들었다. 곡 제목이 '느림보'인 것은 아마 주인공 염미정의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뛰는 법이 없고 느리게 걸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두려워 떠는 번개가 치는 험한 날씨에도 그녀만은 별 반응 없이 차분했으니까. 무표정하게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녀에게도 남모를 상처가 있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 이름은 모르고 성만 아는 구씨라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그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가둔 울타리를 벗어나 해방의 길로 나선 것이다.


그녀가 구씨와의 사랑에 부디 성공하기를. 비록 그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안 되는 다소 자의적이고 어리석은 맹목성을 띄고 있더라도. 원래 사랑이 그렇다.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에 나오는 이 말처럼.


"사랑은 자의적인 것이다. 작은 친절일 뿐인데도 자기의 환심을 사려는 조바심으로 보이고, 스쳐가는 눈빛일 뿐인데도 자기의 가슴에 운명적 각인을 남기려는 의사표시로 믿게 만드는 어리석은 맹목성이 사랑에는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지만 너를 내 안에서 해방시키게. 나처럼', ‘어디든 나의 느림은 배려가 될 거야. 어디든 나의 생각은 깊이가 될 거야.'는 그녀의 고백이. 그녀가 말하는 '해방'이 무엇인지, 나는 이 곡을 통해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표현은 서툴고 늘 느리지만, 일상은 참아야 하는 일 투성이지만, 그런 나의 느림은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누군가에 대한 배려가 될 수 있고,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에 대한 나의 생각은 지루하고 힘든 삶에 깊이를 더해갈 수 있어.


그동안 나를 꼭꼭 숨겨왔지만 이제부터 그전보다 나를 더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는 달라졌기 때문이야. 아직은 네가 낯설고 어색하지만 갇혀 있던 나를 내 안에서 해방시키게 된 건 바로 너 때문이지.


나는 믿고 있어. 너를 보는 나의 마음도, 너를 아는 내 시간도 너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다 보면 좀 더 알게 될 거라고, 너를 통해 내가 해방되었듯이 언젠가 너 역시 내 안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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