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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24. 2022

그녀가 죽지 않고 사는 법

나의 해방일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어젯밤, 짙게 드리운 구름에 시야가 가려서 그런지 시간이 더디게 흘러갔다. 하루였다. 얼마  봤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주인공 염미정이  말이 떠올랐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구씨와 염미정, 반가움을 뒤로 하고 급한 일 때문에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일을 보고 한참 있다가 돌아온 구씨. 그의 얼굴에 난 선명한 상처, 그 상처는 클럽에서 난동을 피우는 여자 때문에 입은 생채기였다.


그는 지쳐서 이렇게 토로한다. "인생이 늘 이렇게, 하루도 온전히 좋았던 적이 없어." 그 역시 긴 하루였다. 그때 염미정은 왜 그랬는지 묻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위로한다.


"하루에 5분,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에 갔을 때 내가 문을 열어주면 '고맙습니다'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떴을 때 ‘아, 오늘 토요일이지.’ 하면서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일은 없고 나쁜 일만 일어나는 날. 운이 없다고 불평하다 보면 자칫 삶의 의욕까지 잃어버릴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흠뻑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해볼까. 좋은 방법이다. 어제처럼 하루 종일 비가 와서 나갈 수 없다면 실내에서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염미정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옆에 있어볼까? 그런 사람도 없다고, '나는 원래 이래. 이렇게 살았어. 어떤 날도 좋았던 적이 없었어' 구씨처럼 그냥 한숨만 쉬어야 할까.


염미정의 말처럼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오늘 하루 나를 설레게 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그때 나는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아무리 무미건조한, 변화가 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아주 잠깐이나마 기분이 좋았던 순간은 있을 테니까. 없었다고? 그럼 어제, 아니 그제 있었던 일이라도 떠올려보자.


책을 읽다가 발견한 아름다운 문장, 배경음악이 아름다운 한 곡의 음악,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제시간에 도착한 지하철, 우연히 발견한 집 근처에 핀 들꽃, 스치듯 눈에 들어온 파란 하늘 등등 각자 잠깐이라도 기분이 좋았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 비록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삭막한 현실에서 숨통이 트일 수 있다.


삶은 기억의 축적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일과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방식이다. 즉, 기억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곧 기다리던 주말, 그녀의 말처럼 '아, 내일이 토요일이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_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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