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계단 위의 여자
7월 개봉한 일본 청춘 로맨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가벼운 얘길 하는 척하지만 제법 묵직한 생각거리를 남겨요. 시작은 발랄해요. 스물한 살 동갑내기 대학생인 남자 ‘무기’와 여자 ‘키누’는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서로를 발견해요.
일면식도 없는 둘은 한두 마디를 나누다 깜짝 놀라요. 신은 신발, 좋아하는 책, 술, 영화, 음악 모든 게 쌍둥이처럼 똑같았거든요. 심지어 영화 티켓을 책갈피로 쓰는 버릇과 햄버거의 양배추와 패티를 따로 떼어먹는 식습관까지 같았어요.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티켓을 사놓고도 가지 못한 사실까지, 서로 똑같단 사실을 확인한 둘은 “운명적 사랑”이라며 동거에 들어가요.
힘들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둘의 러브라이프가 시작되어요. 여자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버는 한편,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남자는 저렴한 가격에 그림을 그리며 생계비를 보태요. 극장에 갈 돈을 아껴 집에서 컴퓨터로 내려받은 영화를 알콩달콩 함께 보아요.
학교 수업도 거르고 취업설명회도 뒷전인 채 사흘 내내 사랑을 나누기도 하지요. 아아, 꿈만 같은 생활! 일이 끝나면 전철역에서 만나(싼값에 구한 집이라 전철역에서 멀리 떨어진) 집까지 함께 걸어가는 30분이 그렇게 로맨틱할 수가 없지요.
하지만 둘은 4년 만에 현실의 벽에 부닥쳐요. 가장(家長) 역할을 하기 위해 꿈을 접고 유통회사에 취직한 남자는 계속되는 업무와 실적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리며 낭만을 상실하기 시작해요.
둘이 좋아하던 게임, 둘이 좋아하던 만화, 둘이 좋아하던 영화가 어느 순간 너무 아이 같고 유치하게만 느껴져요.
“언제까지 대학생 같은 기분으로 살 순 없다”는 남자와 “꿈을 잃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여자는 갈등하고, 결국 둘은 새삼 깨달아요. 운명이라 생각했던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고방식과 취향의 차이가 있었는지를 말이에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자연스럽게 이별해요. 그리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요.
이 영화엔 탁월한 상징이 나와요. 무기와 키누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낀 채 음악을 함께 듣는 습관화된 모습이지요. 둘은 같은 음악을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달라요.
스테레오 사운드로 재생되는 음원을 듣는 둘은 왼쪽과 오른쪽 이어폰을 통해 ‘같은 듯 완전히 다른’ 음악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같은 꿈을 꾼다는 믿음에 사랑은 시작되지만, 둘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갈 뿐이란 얘기지요.
사랑은 꽃다발 같아요. 싱싱하게 시작하지만, 시들어요. 이 영화 속 명대사처럼 “연애는 살아있는 거라 오래 못가”요. “시간이 좀 지나면 서로 공을 돌리면서 경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축구 경기와 같은 것이 연애라고요.
대부분의 사랑은 서로의 교집합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지만, 결국엔 서로의 여집합을 확인하며 막을 내려요. 그래서 세상 하나밖에 없는 연애는 아주 보통의 연애로 끝나요. 특수한 것이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요.
'나는 나의 사랑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쟤도 쟤의 사랑이 특별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사랑은 특별하지 않은 게 아닐까?'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가 던지는 질문이에요.
<이승재, 영화칼럼니스트>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다. 뭔가 들킨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한편으론 주인공들이 처한 현실이 슬프기도 하고.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부모 세대를 봐도 그렇고,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만 봐도 그렇다.
정말 사랑해서 같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떨어지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함께는, 한 지붕 아래서는, 살고 싶지 않게 된 것일까.
이 서글픈 현실 앞에서, 영화 평을 읽으면서 맞아, 정말 이런 거지,라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를 보면서 불편하지 않을 수가 도저히 없었던 거다.
일요일, 주말이 끝나가는 날. 가볍게 시작해야 하는데, 무겁게 되어 버렸다. 며칠 전 읽었던 이 영화 평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 것이라고 영화 탓을 해보지만, 결국 나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도 사랑에 대해 많은 글들을 올렸지만,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뭘 안다고 그렇게 써 댔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실천하지 못했으면서.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자책이 나의 고백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오사무는 솔직하기라도 했지, 나는 그렇지도 못했다.
"부끄러움 많은 생을 보냈습니다. 나는 인간의 삶이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모순된 현실, 갈팡질팡하는 우리들. 그럼에도 좋게 생각하자고. 삶과 나 자신을 너무 비관하지 말자고. 사랑이 다 그렇다고 치부하지 말자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끝까지 남는 사람들도 있다고. 나부터 바꾸면 된다고. 애써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
"여자는 말한다, 젊다는 건 우리가 망쳐버린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느낌이라고. 틀어지고 어긋나 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남자는 말한다, 자신이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는 건 그들에게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가 쉽게 정의될 수 있을 만큼 짧기 때문이라고."
<베른하르트 슐링크 _ 계단 위의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