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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5. 2022

상 실

영화 / 원 데이

어제는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근자에 나를 사로잡았던 상념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의 행로만큼이나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 이제는 정리하고 싶었다.


포기 또는 체념이 아니냐고 하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 단어 외에 지금의 감정 상태를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순전히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빈곤한 탓이다.


실패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말을 아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꾹 눌러 담아야 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테니까. 때로 원망도 하고 싶고, 심지어 비난의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도 싶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는 생각 앞에 그런 불편한 감정들은 속으로 자자들며 그만 무디어지고 만다.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론 쉐르픽 감독의 영화 <원 데이, 2011>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건 몇몇 장면들 때문이다. 엠마(앤 해서웨이 분)가 사랑한 덱스터(짐 스터게스 분), 20년간 그를 그리워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같이 살게 되지만 그녀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어렵게 사랑하는 사람과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다니, 감독을 원망할 수도 없고 답답했다. (대학 졸업식, 바랑둥이 덱스터에게 첫눈에 반한 엠마, 그녀는 20년이라는 긴 시간, 그를 잊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 그의 주변을 맴돈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애까지 낳는 그의 삶의 행로와 그 과정에서 그가 겪어야만 했던 방황의 시간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그녀가 느꼈을 상심, 쓸쓸함을 나는 여전히 가슴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엠마를 잃고 덱스터가 느꼈을 고통과 방황의 시간, 영화에선 잠깐 보여주고 말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상실'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험난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뒤늦게 깨달아서 문제지만 그도 엠마를 사랑했으니, 오히려 그 때문에라도 더 힘들었을 거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인생이 참 허망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온 안드레이 공작의 이야기가 나온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산고로 죽고 만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내는 그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동생 마리아, 그녀가 안드레이의 친구인 피예르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이 이렇다.


"나는 오빠가 몹시 걱정돼요. 겨울이 되고 건강이 회복하긴 했지만, 지난봄에는 상처가 도져서 의사 선생도 요양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리고 정신적인 면에서도 나는 오빠가 걱정돼요. 그는 우리 여자들처럼 자기 슬픔을 마음껏 슬퍼하지도, 울어서 떨쳐버리지도 못해요.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이니까요." 


안드레이가 침잠의 시간을 보내게 된 건 그의 아내의 죽음이 컸다. 부상을 당해 건강도 좋지 않은데,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고 말았으니, 그 '상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안드레이처럼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고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유일한 통로는 이렇게 글을 쓰는 정도. 이마저도 고민의 실체가 아닌 그로 인한 불편함 정도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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