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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Sep 30. 2022

생각만큼 불행하지는 않았던 시절

우연히 부산 해운대의 풍광이 담긴 사진을 보고 벌써 수년 전이 되어 버린, 부산에서 근무할 때가 떠올랐다. 내가 살았던 해운대는 KTX를 탈 수 있는 부산역과 멀었고, 비행장은 더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이 있는 서울을 오가기가 힘들었다. 


멀어서 그런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한 번 다녀오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자연히 서울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오로지 혼자만의 부산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남들은 해운대에서 근무하니 바닷가 휴양지에서 대단한 것을 즐기며 살았던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바다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보면 그만 질리고 만다. 물론 바닷가에 사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소중한 것도 늘 내 옆에 있으면 소중함을 잘 모르듯이, 관광지에 산다고 관광을 자주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을 몇 번 찾아갔지만, 그것도 반복되니 나중에는 바닷가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바다보다는 관사가 있던 좌동 근처 장산을 맴돌았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해운대에 가지 못해 안달인데, 이게 무슨 청승이람.' 해운대를 떠난 지금은 그 시절의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 눈에야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때 깨달았다. 늘 보는 건 보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시큰둥해진다는 것을. 그래도 바다는 바다였다. 가끔씩 들렸던 바닷가, 젊음과 낭만이 숨 쉬는 곳, 왠지 그곳에 있기만 해도 나도 덩달아 젊어질 것만 같은 곳이었다. 

다만 내가 바닷가를 자주 찾지 않았던 것은 흥청망청하는 분위기가 별로였기 때문이지 바다를 싫어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을 이용해서, 아니면 해운대보다 사람들이 덜 붐비는 기장이나 송정 해변을 산책하기도 했으니, 바다를 멀리 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탁 트인 전망과 시원한 바람, 상쾌한 공기(해운대는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거의 없었다)였다. 기장 근처에 있는 전망 좋은 카페들. 바닷바람을 맞으며 야외 테라스에서 읽는 독서의 묘미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잠시 눈을 들어 바닷가를 바라보면 정말 눈의 피로가 금세 풀렸다. 잔잔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 반복되는 파도의 일렁임, 거기서 비롯된 한적함이 주는 여유는 지금 돌아봐도 인상적이다. 

하나 더, 내가 거의 매일 걸었던 장산을 빼놓을 수 없다. 산을 많이 다녀봤지만 장산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좋은 산이다. 오래전 화산 활동으로 생겨서 그런지, 특이한 바위에 무엇보다 산 규모에 비해 작지 않은 폭포도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물이 많은 산으로 기억하고 있다. 


완만한 경사, 정상 주변에 조성된 억새 군락지, 울창한 해송 숲이 주는 싱그러운 공기, 청명한 하늘.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선명한 하늘과 별들을 그곳에서 처음 보게 되었다. 

아무튼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서울을 오가기가 멀다는 이유로 특별한 일이 없으면 부산에 있었으니 2년간은 나는 부산 사람이었던 셈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서울 촌놈인 내가 검사가 되어서 비로소 제2의 도시 부산에서 살게 되었던 거다. 


그래도 평검사 시절 근무했던 대전, 대구 정도는 내륙이라 그런지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 가서 그런지 고립감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쩌면 일이 너무 많아서 매일 야근을 해야 했으니 거기가 지방인지, 서울인지 알 틈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검사들은 왜 그렇게 일이 많았는지 그래도 밤을 새워서라도 주어진 일을 해냈으니, 요즘 MZ세대 검사들이 보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다. 하긴, 검사만 그랬겠는가.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은 대부분 젊음을 바쳐 가정을 희생하면서까지 열심히 일했다. 


이것 말고도 부산에 대해 할 말이 조금 더 남아 있다. 그건 다음 기회를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 중 극히 일부만 다녔고, 관광을 즐기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무슨 대단한 정보를 기대하지는 마시라. 그래도 현지인처럼 부산에서 살았으니 부산 특유의 정서나 느낌은 엇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느낌을 제대로 표현해낼 정도로 내 필력이 뒷받침될지는 의문이지만. 


부산 생활이 항상 좋지만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외롭고 적적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생각했던 것만큼 불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만큼 내 삶이 풍성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별로인 기억도 지나고 나면 행복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결국 행복은 마음의 상태, 즉 정도의 문제니까, 그러니 지금 힘들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기를. 이 또한 지나가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 

“불쾌하고 기분 나쁜 추억도 괜찮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런 추억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한 순간도 있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행복이란 정도의 문제여서 그것을 적절히 지배하는 사람은 결코 완전히 불행하다고는 할 수가 없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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