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산책
지난 주말 오랜만에 남산을 걸었다. 남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쭉 살았음에도 남산을 간 건 손으로 꼽을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가까이에 있어서 오히려 더 안 가게 되는 것 같다. 벌써 10월인데도 한낮은 더웠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도 꽤 있었다.
별생각 없이 평소 입던 긴팔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갔는데, 중간에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다. 남산 둘레길은 코스가 다양해서 잘 골라서 가지 않으면 헤맬 수 있다. 그날은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내려 장충단 공원을 가로질러 남산 둘레길을 돌아 남산서울타워까지 가는 코스를 택했다.
장충단 공원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좀 힘들 뿐 둘레길 자체는 평탄했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지만 등산을 할 때처럼 부담을 주는 정도는 아니다. 계단을 올라 둘레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아름다운 남산의 전경이 쭉 펼쳐진다. 신록의 계절, 바야흐로 계절은 여름의 끝을 지나 가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서울에 사는 나는 복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파리에는 에펠탑과 몽마르트르 공원이 있고, 뉴욕에는 센트럴파크가 있지만, 서울에는 북한산과 남산이 있다. 두 도시에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특히 남산은 자연과 인간의 노력이 조화를 이룬 산으로 시민들이 걷기 좋은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도시들의 구조물과 공원은 인간을 압도하지만, 남산은 사람과 함께 숨 쉬는 곳이다. 중국의 자금성과 비교해 경복궁이 규모는 한참 뒤지지만 주변 환경과의 조화면으로나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나 더 우아한 완성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둘레길 옆에는 도랑이 있어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꽃들이 활짝 피었다. 특히 선명한 색깔이 특징인 튤립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일부러 심은 건지 아니면 저절로 핀 건지 아무튼 보기 좋았다.
남산둘레길에는 차들이 다니지 않는다. 이따금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걷기에도 좋은 곳이지만, 자전거 타기에도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신록이 절정이었다. 짙은 초록색으로 치장한 나무들은 계절의 변화를 무색하게 하듯 산 곳곳을 아름답게 채우고 있었다. 산이다 보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시내보다는 비교적 적었다. 조용히 산책하는 사람들, 일행들과 함께 정다운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들 모두 한적한 주말 오후의 남산을 즐기고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덧 남산서울타워가 보였다. 근처를 운전하면서 멀리서 보긴 했지만 막상 이렇게 산에 올라와 직접 본 건 몇 년 만이다. 타워 정상에는 팔각정이 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특히 외국인이 많은 것은 타워가 서울을 상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워까지 나처럼 걸어서 갈 수도 있지만 타워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걷기 불편하면 버스를 이용하면 한결 수월하게 타워에 올라갈 수 있다.
늘 그렇듯 타워 전망대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멀리서 서울 풍경을 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초목과 꽃을 더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워 주변을 보니 외벽 곳곳에 걸어놓은 자물쇠들이 눈에 띄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늘어 이젠 더 이상 걸어놓을 공간조차 없어 보였다.
남산에 자물쇠를 채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돌면서 언제부턴가 이곳을 방문한 연인들이 영원히 헤어지지 말자는 염원을 담아 자물쇠를 달아놓은 것이 이렇게 많은 자물쇠들이 채워진 계기라고 한다. 저렇게라도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보여 자물쇠 한 개 한 개가 애틋했다.
저 자물쇠들을 걸어놓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어지지 않고 잘 살고 있을까. 그 시절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약속들과 다짐들, 이젠 잊힌 약속들,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무수한 약속들과 사연들이 눈에 선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저게 다 무슨 소용이람, 하고 눈길도 주지 않고 넘어갔을 텐데 사연이 담긴 자물쇠들을 보니 나도 그때 저렇게라도 해 놓을 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모두 지나간 일이 되어 버렸지만.
자물쇠들은 서로의 사랑과 약속을 지키기 위한 증표로 삼은 것이니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신이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힘에 (그것이 신이든, 신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이든) 의지하는 것인데,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고 지켜가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니 쓸데없는 짓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한참 동안 그곳에 걸린 자물쇠들과 옆에 붙어 있는 메모들을 살펴본 후 아쉬움을 뒤로한 채 그곳을 떠났다.
내려오는 길은 한결 수월했다. 타워 밑으로 내려와서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 내려갈 수도 있고, 왔던 길로 계속해서 다시 내려갈 수도 있다. 똑같은 길을 다시 걷기 그래서 계속 가던 길을 택했다. 올라올 때만큼 길이 화사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볼 걸 다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남산의 그 유명한 음식점 '남산돈까스'를 남산 힐튼호텔까지 걸었다. 힐튼호텔이 철거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건축사적으로 역사적인 건물을 굳이 철거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리모델링을 해서 쓰면 좋겠지만, 우리는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을 좋아하니, 경제적인 잣대로만 판단하니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조금만 걸으면 서울시청과 광화문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지하철을 타지 않고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서울시청과 광화문은 행락객들로 무척 붐볐다. 집에 돌아오니 5시가 훌쩍 넘었다.
마땅히 걸을 만한 곳이 없으면 남산을 추천한다. 걷는 사람들이 많으니 함께 걷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경치가 빼어나 눈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간중간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서울 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도 있다.
10월의 어느 가을, 남산을 걸었던 기억을 남기고 그렇게 흘러갔다. 언젠가 이 시절을 떠올리게 되면, 뉴스를 장식한 거대 담론이나 세상 소식들이 아니라, 어찌 보면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이런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내 바람이기도 하고.
"왜 하나의 순간은 이렇게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을까? 중요하거나 선명하게 기억하는 획기적인 성공, 혹은 실패의 순간은 영혼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 영혼을 만드는 것은 스쳐가는 지극히 '사소한 순간'이다."
<존 번사이드(John Burn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