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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Nov 21. 2022

우연을 영원에 기록하고 고정하는

앙드레 고르 / D에게 보내는 편지

신문 칼럼에서 "우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알랭 바디우의 글을 읽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철학자 앙드레 고르(Andre Gorz)와 그의 영국인 부인 도린 케어에 관한 이야기다. 20대 초반에 우연히 만나 80대 초반,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랑했다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다. 


일반적으로 처음 만나 뜨겁게 사랑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사랑이 식든지 아니면 미운 '정' 고운 '정'으로 변하게 마련인데 이 부부는 달랐다. 불치병에 걸린 부인을 위해 한적한 시골로 집을 옮기고 급기야 앙드레 고르는 부인을 따라서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영원이 있다면 아마 영원히 사랑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뜨겁고 일관된 사랑이었다.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설사 인연이 된다고 해도 그 인연을 영원에다 기록하고 고정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사랑이 불멸일 수 있을까? 아름답고 애틋한 표현이지만 나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워 이 문장을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쩌면 영원히 살지 못하는 인간이라서 혹시 영원히 산다면 거기에 기록하고 고정할 정도로 사랑했을 거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는 자신이 쓴 글 중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아내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내와의 첫 만남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한 통의 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과거에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앞으로도 사랑할 도린 케어에게 보내는 편지, <D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그녀에게 고백한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줄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김훈 작가는 이 책의 추천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경이로운 사랑은 기다림이나 그리움 같은 결핍의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살아 있는 모든 순간마다 생명 속에 가득 차서 삶으로 발현되는 사랑이다. 사랑은 삼인칭의 타자로서 내 앞을 가로막는 ‘그’를 이인칭의 상대인 ‘너’로 전환시키고, 그 너에 다시 ‘나’를 포개서 내 안에 그와 너가 공존하면서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 나는 앙드레 고르가 남긴 편지와 알랭 바디우의 문장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했던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또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당신은 내게 삶의 풍부함을 알게 해주었고, 

나는 당신을 통해 삶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내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다면, 

나는 결코 세상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앙드레 고르 _ D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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