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Jul 01. 2021

사랑하고 있습니다

무진기행/김승옥

6월의 마지막 밤. 가는 세월이 아쉬워서 그런지 아니면 지난 시절이 그리워서 그런지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1964>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다. 소설은 주인공이 안개가 자욱하게 낀 무진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시작된다.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함축적이다.




오늘은 소설의 줄거리를, 문장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줄거리는 오래되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끝에 이 소설이 생각나서 몇 자 적는다.


길을 가다가 멋진 사람을 보게 되면 시선을 한 번 더 주게 된다. 그러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말지만. 인연은 그(녀)와의 사연이 있는 한 편의 소설과 같은 것인데, 그들은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불과할 뿐인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무진에 사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와의 짧은 인연을 뒤로하고 다시 가족이 있는 서울로 가야 하는데,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끝내 들어주지 못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편지 한 장을 남긴다. 그 편지는 이렇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기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은 꿈과 낭만이 허용되지 않은 꽉 막힌 사회에서 소외당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무진은 꿈이고, 돌아가야 할 서울은 현실이다. 주인공은 무진에 머물고 싶지만, 언젠가는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좀 더 젊었다면,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면 그는 좀 더 무진에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엔 나이가 들고 말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끌었던 건 저 편지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옛날의 자기 자신이라는 고백, 그래서 과거의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다시 현재로 끌어낼 거라는 다짐. 그러나 끝내 돌아가지 못하고 그녀와의 매개체인 편지를 스스로 찢어버리고 마는 참담함.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쓰고 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 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국 주인공은 예전의 자신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시 현실로 돌아가고 만다. 그가 현실을 생각하는 순간, 그녀와의 사랑은 증발되었다. 현재를 살려면 이성적이 되어야 하고, 과거의 풋풋했던 감정을 되살리려면 감성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기 위해선 감성과 순수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를 생각하니 감성으로 충만했던 예전의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없는 거다. 나이가 들면 사랑하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주인공은 그녀를 사랑하기 위해 예전의 자신을 끌어내려고 하지만, 끝내 현실 앞에 막히고 만다. 우리 모두처럼.  




사랑은 실패로 끝나기 쉽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말조차 할 수 없으니까. 애절한 마음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아니, 그 사람만이 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찢어진 편지처럼 실패가 예견되어 있는 운명과도 같은 것, 그게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실패한 사랑만이 온전한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나도 주인공처럼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지 않는 한,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전하지 못하고 끝내 찢어버린 편지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버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운 침묵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