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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11. 2023

나 이

어제 아침, 나는 사무실이 아닌 병원에 있었다. 주말 내내 증세가 별로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병원은 한산했다. 의사는 별거 아니라는 듯 몇 가지 증상을 물어보고 처방전을 줄 테니 이틀간 새로운 약을 복용해 보라고 한다. '약 먹기 싫은데...' 속으로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불편하고 아프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양이 앞 생쥐처럼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다. 


병원 바로 밑에 있는 약국에 들러 처방전에 따른 약을 받았다. 약이 꽤 많았다. '무슨 성분이길래 이렇게 약이 많아?!‘ 여전히 불편한 심정으로 약 봉투에 적힌 약성분을 살펴보다가 문득 이름 옆에 있는 '나이'에 눈길이 갔다. 평소엔 내가 몇 살인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막상 활자화된 나이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2023년도 벌써 열흘 가까이 지났는데, 나는 내가 올해 몇 살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지냈던 거다. 


생각해 보니 언제부턴가 나이를 잊고 살았다. 잊었다기보다 내가 몇 살인지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가끔 이렇게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거나 진료 대기 번호표를 받을 때 확인하는 게 내 나이였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딱히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뿐이다. 더 이상 젊지도 그렇다고 나이가 아주 많이 들었다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한 나이(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기준이다)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젊은것 같고 마치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나이’만 한 것이 없다.


약 봉투를 보면서 나도 나이를 꽤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 그 시간들이 나를 바꾼 건 무엇이고 바꾸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아쉽다는 생각부터 들었는데 오늘은 이 생각이 들었다. 철이 든 걸까? 그렇다면 다행인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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