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 파르마 수도원
그 눈빛!
그 눈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던가!
참으로 깊은 동정심이었어.
그 소녀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이 보였지.
삶이란 이처럼 불행을
날실 삼아 짠 베와 같군요.
당신께 닥쳐온 일에 대해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불행을 짊어진 채
살아가지 않나요?라고.
<스탕달 _ 파르마 수도원>
스탕달의 <파르마 수도원>을 몇 년 전에 읽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겨울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던 것 같다. 실제로도 추웠지만, 내 상황 때문에 더 춥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외부환경은 내 마음의 상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유가 있고, 주변에 따뜻한 시선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다면 추워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영화에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집에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흐르고,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모두 식탁에 모여 앉아 정다운 얘기를 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장면 자체로도 유복한 가정이고, 가족들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 평범한 장면이 인상 깊었던 건 다른 이유였다. 그 집안을 밖에서 물끄러미 훔쳐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도 그 장면 속 가족들처럼 자신의 가족들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시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환경과 상황은 내가 처한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물론 상황이 좋으면 괜찮지만 언제나 그럴 수는 없다.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집안을 훔쳐보며 대리만족을 하며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스탕달의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파브리스는 자신을 지켜보는 소녀의 눈빛에서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이런저런 이유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한다.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불행한 시기도 있다.
왜 인생이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행복한 순간에는 그 순간을 누리되, 그 순간에도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겸손해야 한다. 한편 불행한 시기에는 언젠가 나도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리라 믿고 인내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한 시기를 잘 이겨냈다면, 내 주변에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작품 속 소녀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주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어렵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면, 지금 이 순간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헨리 나우웬이 말한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물론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라는 상처를 통해 우리의 치유자, 구원자가 되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상처의 또다른 의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