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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an 26. 2023

사 색(思索)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관성의 법칙, 나는 익숙한 곳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 가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 어제는 긴 연휴 끝에 출근해서 그런지 사무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무실을 떠난 지 며칠 됐다고?!


그제부터 시작된 혹한이 어제 아침까지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린 것만 같았다. 추위 탓인지 오랜 연휴 때문인지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그제밤엔 평소 하던 산책도 할 수 없었다. 낮에 잠깐 나가보니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추위가 대단했다. 낮에도 무려 영하 13도,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넘었다. 중무장을 했지만 다 가릴 수 없는 얼굴에 찬바람이 그대로 부딪혔고, 추위로 얼얼해질 정도여서 더 이상 걷기 조차 쉽지 않았다. 평소 가던 길을 다 걷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설 연휴를 보냈으니 새로운 한 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보지만, 마음 한편에는 마음먹은 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했다고, 묵은 마음은 털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마음에 잡념과 걱정이 들면 펼치는 책이 있다.


작고한 신영복 교수의 옥중서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이 책은 20년간 수감생활을 하면서 옥중에서 밖에 있는 어머니를 비롯한 친척들에게 보낸 서간문 형식으로 쓰인 산문이다. 사상범으로 수감되었으니 편지도 철저히 통제되었을 터, 외부와 유일한 소통의 통로였던 서신 쓰기. 최대한 절제된 표현을 쓰면서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를 다듬고 완성해 갔다. 그러니 실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기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상적 전력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려움에 위축되지 않은 채 그 상황을 자기 성장과 성숙의 기회로 삼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를 인간적으로 존경한다. 그가 1981. 10. 21.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쓴 서신의 일부가 이렇다.



"가을날 새벽이 자라고 있는 창 밑에서 저희는 이따금 책장을 덮고 추상(秋霜) 같이 엄정한 사색으로 자신을 다듬어가고자 합니다.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 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감옥이라는 척박한 현실, 그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야 했던 그는 바른 생각을 한결같이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자신의 생각이 그저 사변에 그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했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은 삶은 공허하거나 사변에 불과하다는 지적, 무척 공감이 되었다.


감옥에 갇혀 추상같이 엄정한 사색으로 자신을 다듬어갔던 신영복 교수. 반면 자유로운 상태에 살지만 세상사에 얽매어 매일매일을 별다른 사색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나 사이에 누가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을까. 모든 것은 결국 장소나 환경이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인데도, 나는 이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새해 기억해야 할 건 바로 그 사실이다.




"새해란 실상 면면한 세월의 똑같은 한 토막이라 하여 1월을 13월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만약 새로움이 완성된 형태로 우리 앞에 던져진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움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모든 새로움은 그에 임하는 우리의 심기(心機)가 새롭고, 그 속에 새로운 것을 채워나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어지는 새로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신영복 _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8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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