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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09. 2023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 / 스푸트니크의 연인

가끔 나는 '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물은 적이 있다. 질문을 한다고 해서 내가 나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나는 내가 누군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해봤자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나 습관 혹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도로 지극히 지엽적인 정보에 불과하다. 단편적으로 아는 것이니, 본질적인 질문 앞에서는 늘 말문이 막힌다.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마저도 정확히 안다고 할 수 없다. 대학 시절, 미팅을 할 때 상대가 '취미가 뭐냐,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등을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 가장 멀리 있는 애매모호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가깝다는 의미는 나만큼 나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일 테고, 멀다는 뜻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지구를 돌아 바로 그 자리에 있는 나를 보는 것이니 그 거리만큼 멀리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마저도 나는 나를 보기 어렵다. 바로 옆에서 보는 사람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튼 이런 고민을 중고등학생 시절에 한동안 골똘히 한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이런 질문이 답을 찾을 수 없는 지극히 형이상학적인 질문임을 깨닫고 능력 밖의 문제라고 체념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본질적인 의문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으면서 작가 역시 같은 고민을 해서 그 부분을 관심 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나란 무엇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놓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언급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말하는 사람으로서의 나에 의해(그 가치관과 감각의 척도와 관찰자로서의 능력과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관계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규정되고 잘라내어 지게 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언급되는 '나'의 모습에는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줄곧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92-93p)




맞는 말이다. 나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세상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물들고 욕심과 욕망이 개입하면서, 어느덧 과거의 나를 잃어버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부정하고 미래의 나를 왜곡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편집해서 보게 되었다. 객관적이지도 전체적으로도 볼 눈이 없어진 거다.


물론 하루키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명료하게 답을 주지는 못한다. 아마 이 답은 죽기까지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처럼 외모 지향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외모가 자신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겠지만,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혼자 있을 때 뭘 하며 보내는지 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선뜻 말할 자신이 없다. 너무 복잡하고 고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이 질문 자체를 우리는 오래 회피하고 살았으니까.




* 루카스 유센(Lucas Jussen) & 아르투트 유센(Arthur Jussen)

ㅡ J.S. Bach Cantata, BWV 208 - 9. Schafe können sicher wei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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