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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r 25. 2023

어느 한 남자의 쓸쓸한 사랑

니콜 크라우스 / 사랑의 역사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한 소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웃음소리는

소년이 평생을 바쳐 답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고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졌습니다. 니콜 크라우스의 장편소설 <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레오 거스키'가 주인공입니다. 그녀에게 끝내 전하지 못한 답을 붙든 채,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 그는 자신이 했던 사랑을 글로 남기기 시작하고, 한 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하나이며 똑같다고 믿었다. 책이 끝나면 나도 끝날 거라고, 큰 바람이 방을 휩쓸어 원고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고, 허공에 펄럭이던 흰 종잇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방이 고요해질 거라고, 내가 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빌 거라고. 매일 아침 조금씩 더 썼다. 그건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소설은 사랑하는 여인 '앨마 메러민스키'를 기다리다가 노인이 된 레오 거스키가 쓴 동명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우연한 기회에 그의 친구에게 넘어가 출판이 되었고, 동명의 소녀 앨마의 어머니가 출판된 그 책을 번역을 하게 되면서 소녀와 거스키가 연결됩니다.


거스키가 사랑한 앨마는 그와 연락이 끊어진 후 미국에 와서 다른 남자랑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아이작은 실은 거스키의 아들이었습니다. 아이작은 성장해서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자신의 아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거스키, 끝내 아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아이작 또한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레오 거스키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거스키가 죽기 직전 앨마 싱어라는 소녀를 만나는 부분입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를 보았다. 가슴이 지시를 내릴 때 머리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눈, 그 눈을 보고 그녀를 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천사는 바로 이렇게 오는구나. 그녀가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나이에 멈춰진 모습으로.'


거스키는 앨마라는 소녀에게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봅니다. 어쩌면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하고 매일 그리워하다가 또 다른 앨마에게서 자신의 앨마를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본 낯선 사람에게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어린 앨마의 시선으로 거스키를 보는 작가. 앨마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늙은 할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열 살 때 사랑에 빠진 소년을 찾아보았다. "이름이 앨마 메러민스키인 소녀를 사랑한 적이 있나요?"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 할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버지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그 아들, 그 사람 이름이 아이작 모리츠인가요?"'


'나는 생각했다. 난 이렇게 오래 살아왔어. 아이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었다. 내 사랑이 어떤 소소한 방식으로 그애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은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못된 문장을 고르게 될까봐 두려웠다.'

거스키는 자신이 사랑했던 앨마를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또 다른 앨마를 만난 후 얼마 있다가 혼자 쓸쓸히 죽습니다. 혹은 앨마를 생각하다가, 혹은 생각하지 않으려 하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었고, 그녀와 그녀에 대한 사랑이 그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어떤 사랑은 누군가에게 생의 모든 것을 걸 정도로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제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앨마의 사정을 알게 된 거스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앨마가 낳은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지, 아이작이 죽기 직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실은 거스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는 표현보다는 먹먹하다고 할까요? 그 순간에는 말조차 무력해졌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의 흔적들, 글로밖에 남길 수 없었던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졌습니다. 그가 글을 썼던 이유도 조금은 알게 되었구요.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진 불가피한 이별.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과거를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거스키의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 앨마를 찾았고 오래전에 딱 한 번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앨마에게는 미국에서 만난 남편이 있었지요. 그리고 그 후 그녀가 어디 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앨마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더 이상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들 아이작에게도.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입니다.




"옛날에 소년이었던 남자, 살아 있는 동안 절대로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남자가 그 약속을 지킨 것은 고집스러워서도 심지어는 충실해서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삼 년 반을 숨어 지내고 나니, 자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아들에게 품은 사랑을 숨기는 것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 같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하나뿐인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마 거스키는 평생 혼자 살면서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았던 지난 삶과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대해서. 영원한 연인 앨마와 아들 아이작에 대해서. 그 생각들이 책이 될 정도로 그의 사유는 깊어졌고, 삶의 지평은 넓어졌습니다. 물론 많이 힘들고 괴로웠을 겁니다. 자신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자 거스키가 저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 거스키였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사랑하는 여인, 앨마는 잊고 다른 여자를 만났을까? 하루하루 한숨만 쉬면서 쓸쓸하게 그리고 마지못해 살았을까? 아니면 나처럼 글을 쓰며 고독을 벗 삼아 또 다른 삶을 완성해 가려고 애썼을까?' 지금부터 답을 찾아야겠습니다.


* 책 속의 한 줄


“우리의 삶이 무심코 교차할 수도 있는 온갖 방식을 ㅡ 기차 안에서나 병원 대기실에서 우연히 나란히 앉게 되는 상황을 ㅡ 헤아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내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년 시절에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살면서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이었다. (...) 나이가 더 들고는 진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실재하는 것들에 대해 쓰려고 했다. 세상을 묘사하고 싶었다. 묘사되지 않은 세상에 사는 것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다." (16p)


"어딘가에 말하고 싶다, 용서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그렇긴 하지만. 살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때가, 아니 여러 해가 있었다. 추함이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 세상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세상도 내게 인상을 썼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혐오의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34p)


“넌 어떤데? 넌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하고, 또 가장 슬프니?” “물론 그렇지.” “왜?” “그 무엇도 나를 더 행복하게, 더 슬프게 하지는 못하니까, 너 말고는.” (142p)


"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항상 노력해 왔다. 그게 내 묘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오 거스키.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185 - 186p)


"그는 진실을 견디며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법." (239p)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때가 있었고,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한 때도 있었다. 최소한 삶을 꾸리기는 했다. 어떤 종류의 삶? 그냥 삶. 나는 살았다. 쉽지는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것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3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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