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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13. 2023

좋은 포도주를 만들려면

작가 박완서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포도주가 만들어지려면 무엇이 필요하냐?"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포도, 소주, 설탕, 뭐 이런 대답을 내놓았는데, 박완서 선생의 대답은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품종의 포도나 비옥한 토양, 햇볕 등 물질과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포도주를 숙성시키고 맛과 향을 깊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입니다. 기다려야 한다는 거지요. 빈티지가 오래된 포도주가 그렇지 않은 포도주보다 값비싼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습니다. 단군 신화와 관련하여 호랑이와 곰의 운명을 가른 것도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관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 입장만 생각하면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고 존중할 때 비로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그래서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사랑 역시 기다림을 전제로 합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시간의 대부분은 연인을 기다리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한귀은 교수도 그의 책 <이별 리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의 숙명적인 정체도 '기다림'이지만, 이별의 필연적인 전조도 '기다림'이다. 나를 떠날 사람은, 나를 기다리게 한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이 '기다림'이 나를 그(녀)로부터 더욱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곱씹어 볼수록 맞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 함께 있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해 이별하고 이별하더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그를 기다리면서 고통스러워합니다. 결국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포기할 것이냐, 참으며 기다릴 것이냐, 선택의 문제라는 거지요.   

우리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지만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좀 더 성숙해지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구요. 시간이 해결해 주는 문제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하는가? 입니다.


반복되는 일상, 피하고 싶은 현실. 기다림에 지쳐 한숨만 쉬고 있어야 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차피 주어진 상황이고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좋은 방향으로 활용해 보겠다고. 그동안 소홀했던 나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고 주어진 삶을 지금보다 좀 더 밀도 있게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는 거지요.


뭔가 상황이 꼬여 있다면 내가 먼저 정상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분명 달라져 있을 겁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기다린 사람을 세월은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 다윗 등 신앙의 선조들도 모두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강해지고 그들은 더 성숙해졌습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하고 지루해하면 결국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남는 건 더 큰 허무뿐입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도 나의 일부인데 그렇게 삶을 낭비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끝까지 기다리자고.' 찬란한 봄을 맞기 위해선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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