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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21. 2023

사랑할 때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ㅡ 벚꽃 편지

눈부신 봄날이 가고 있습니다. 벚꽃을 비롯한 봄꽃도 이제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지나고 나면 늘 아쉬운 건, 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꽃은 지기 위해 피어난다고 하죠. 맞는 말 같습니다. 이렇게 짧게 피고 질 거면 왜 피었을까, 묻고 싶지만 우문(愚文)인 만큼 현답(賢答)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차라리 아름다운 순간은 원래 짧다고, 그래서 있을 때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가슴에 새기는 편이 나을지 모릅니다. 얼마 전 벚꽃이 한창일 때 그 꽃들이 저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아름다운 봄이 왔어요. 꼭 1년 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지난겨울은 좀 추웠죠. 추위와 바람 때문에 저희도 나무에 숨어 몸을 한층 움츠리고 있었어요. 어서 추위가 지나가기만을 바랐지요. 나무가 타이르더군요. 이 추위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거라고. 그러니 불평하지 말고 잘 견디라고. 내가 도와주겠다고. 그래서 그런지 우린 잘 견뎠어요. 겨우내 생명을 유지하느라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강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봄에 잠깐 피고 말 거면서 뭘 그렇게 참고 살았느냐고? 맞는 말이에요. 우린 잠깐, 그것도 아주 잠깐 피었다가 사라지니까요. 사람들은 그 짧은 순간만이 우리의 전 생애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더 많은 준비 시간이 필요하죠. 보름 남짓 피기 위해 거의 1년이나 참고 인내해야 하니까요.


한 해 여름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서 차고 건조한 가을이 되면 깊은 잠에 빠져들죠. 이 잠에서 깨려면 일정 시간의 추위를 겪어야 해요. 냉각량(冷却量·저온요구량)을 채워야 하는 거죠. 저희가 깨어나서 꽃으로 피려면 개나리보다 더 오래 추위를 겪어야 하고 따뜻한 날도 더 많이 필요해요. 이제 제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희의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이해가 되시나요? 꽃으로 피는 시간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라고 했어요. 저희를 볼 새로운 눈이 생겼나요? 시선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 테니까요. 사람들은 우리의 화려한 모습에만 주목하고, 우리가 참고 노력하는 시간은 간과해요.


그런데 참, 저희가 지천에 피었는데 도대체 얼굴이 왜 그래요? 인상 좀 펴고 다니면 안 되나요?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이 너무 많다구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닐 걸요. 다 비슷할 거예요. 시선을 바꿔보면 어때요? 시선을 돌려 창밖에 핀 저희를 보세요. 그리고 웃으세요. 봄날은 짧아요. 인상 쓰고 다니기엔 너무 아까운 날들이죠. 저희는 잠깐 피었다가 지지만 당신은 그래도 저희보다 긴 삶을 살지 않나요? 우리처럼 그 시간들을 아름답게 채워가면 어때요. 태어나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살아가는 건 의지와 노력이죠.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군요. 아쉽지만 내년에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아요. 아마 당신이 내년에 보는 꽃은 제가 아닐 거예요. 당신이 저와 함께 한 이 순간을 마음에 간직한다면 모를까. 당신은 저를 곧 잊겠지만, 저는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오직 이 봄만 사니까요. 이 순간이 마지막이니까요. 이만 총총.




인간인 제가 이 봄에 핀 꽃보다 오래 사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그 꽃만큼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이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한 계절만 사는 꽃보다 오래 살지만, 꽃만큼 제대로 무엇보다 성실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시선이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물인 꽃보다 나은 존재일까요? 꽃의 본질은 피었다가 지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본질에 충실한 삶일까요? 봄날은 가는데, 벚꽃은 지고 말았는데, 저를 향한 질문은 끝이 없었습니다.   


사랑할 때는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살아갈 때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 수 없다고 노력 자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처럼 우리는 노력하는 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제대로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아름다운 벚꽃만큼이나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편지를 지금에야 열어봤네요. 이 편지를 보낸 당신은 이미 지고 없는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수신자가 없으니 답장을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것은 지나고 나야 비로소 그 가치를 알게 되나 봅니다. 저처럼 너무 늦게 깨달으면 후회하게 됩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꽃과 관련된 아름다운 문장으로 답장을 대신합니다. 미안합니다.  

“꽃은 내게 기쁨을 주었다. 꽃들은 몇 세기 전에 아마도 아시아로부터 와서는 영원히 귀화하여 이 마을에 자리 잡고는, 소박한 지평선에 만족하며, 햇빛과 물가를 사랑하며, 기차역의 소박한 경치에 충실하며, 그러나 프랑스의 오래된 화폭에 그려진 몇몇 그림들처럼 그들의 서민적인 소박함 속에서 여전히 동방의 찬란한 시학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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