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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26. 2023

다자이 오사무 ㅡ 사양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사양> 주인공은 결혼에 실패하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가즈코, 그리고 가즈코의 어머니와 그녀의 남동생 나오지, 이렇게 3명입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패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가즈코는 패전의 아픔과 귀족가문의 몰락이라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여성으로, 나오지는 지식인으로 현실에 절망하여 점점 나락에 빠져들어가는 모습으로, 어머니는 귀족 출신으로 신분에 걸맞은 품위와 격조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명 더, 나오지의 지인으로 나오는 작가 '우에하라'가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은 이렇게 4명이지만, 모두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분신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소설에서 가즈코가 되었다가 때로 나오지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 그리고 우에하라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전후 시대라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나오지처럼 절망하고 자포자기할 것인가. 또는 우에하라처럼 현실을 외면한 채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술만 마시며 삶을 소모할 것인가. 아니면 가즈코처럼 의욕과 사랑을 불태우며 척박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인가. 다자이 오사무는 이 시대를 사는 저에게 묻고 있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라고 다를까요?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장소, 시대 그리고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제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스스로에게 자문했습니다. 내가 나오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즈코라면?




저는 이 소설을 가즈코의 '사랑', 나오지의 '절망', 어머니의 '품격', 우에하라의 '냉소'로 요약하고 싶습니다. 물론 어떤 단어로 누군가의 삶을 정의하는 것이 마땅치 않지만 어차피 제한된 공간에 쓰는 글이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큰 흐름이 이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을 좀 더 정확히 알려면, 우선 다자이 오사무가 왜 소설의 제목을 <사양>이라고 지었는지, 도대체 '사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사양(斜陽)'은 '저녁 무렵의 저무는 해'를 뜻하고, '새로운 것에 밀려 점점 몰락해 가는 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몰락한 계급,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의 비극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제목만 보면 그렇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을 통해 역설적으로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주인공 가즈코를 통해서지요. 희망을 가지려면 먼저 정직하게 절망해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책 제목에만 충실한 인물이라면 주인공은 물론 나오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누나인 가즈코에게 쓴 장문의 편지와 가즈코가 보게 되는 그의 '박꽃 일기' 말고는 화자인 가즈코의 입을 통해 등장할 뿐입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사랑과 혁명을 쟁취하는 인물은 가즈코입니다.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가 서른아홉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에 쓴 작품입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에서 자기 파멸의 절망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과는 달리, ‘사양’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깊은 이해 그리고 희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세계가 깊어졌다는 뜻일 겁니다.


아름다운 봄날,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왕 이 소설에 대해 썼으니 나오지와 가즈코에 대해 좀 더 말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아무래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아쉬움은 가즈코의 아름다운 말로 대신하고 싶네요.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가즈코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悲哀(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지금 비애와 슬픔의 극한을 지나고 계신 분이 있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의 이 글을 읽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반짝이는 아스라이 빛나는 희망의 불빛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머니가 지금 행복한 게 아닐까, 하고 문득 생각했다. 행복감이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반짝이는 사금 같은 것이 아닐까? 슬픔의 극한을 지나 아스라이 신기한 불빛을 보는 기분. 이런 게 행복감이라면 폐하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거다.


고즈넉한 가을날 아침, 햇살 따사로운 가을 뜰. 나는 뜨개질을 멈추고 가슴 높이로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 전 지금껏 어지간히 세상 물정을 몰랐나 봐요."라고 했다." (1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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