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수 Apr 27. 2023

자꾸만, 어긋나는 삶

다자이 오사무 / 사양

다자이 오사무 <사양>의 또 다른 주인공 '나오지'. 그는 고등학생 시절, 자신과는 다른 계급에서 자란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튼튼하고 억센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마약을 하게 됩니다. 아마 귀족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다른 계급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었지만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어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강제로 징집되고 그곳에서도 살아남는 마지막 수단으로 아편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무엇이 나오지를 절망으로 이끌었을까요?  



그는 이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루하루 욕망이 이끌리는 대로 살아갑니다. 돈이 생기면 하루 종일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돈이 떨어지면 집에 마지못해 들어오는 식입니다. 그런 나오지를 바라보는 누나 가즈코와 어머니도 힘듭니다. 그러나 그를 일체 탓하지 않습니다. 마치 살아만 있어 주어도 고마운 일이라는 듯합니다. 아마 그가 절망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오지는 끝내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고 가즈코에게 편지를 남긴 채 생을 마감합니다.



'저는 제가 왜 살아 있어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다만 귀족이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놀았고 황폐해졌습니다. 저는 천박해지고 싶었습니다. 강인하게, 아니 난폭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위 민중의 벗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술 정도로는 도저히 안 되겠더군요. 늘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자면 마약 외에는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잊어야 한다. 아버지의 피에 반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상냥함을 거부해야 한다. 누나에게 차갑게 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의 방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놀면서도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쾌락의 불감증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다만 귀족이라는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고 놀았고 황폐해졌습니다. 저는 죽는 게 낫습니다. 저에겐 소위 생활능력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남과 다툴 힘이 없습니다. 저는 남을 우려먹을 수조차 없습니다. 저에겐 희망의 지반이 없습니다." 



나오지는 귀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썼지만 실패했고, 귀족 신분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늘 불안하고 힘들었습니다. 위선적인 지도층 사람들과 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사람들, 강한 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척하는 사람들, 잘해보려고 했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현실, 선의는 왜곡되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세상으로부터 자꾸만 빗나갔습니다.


"인간은 거짓말할 때 으레 진지한 표정을 짓는 법이다. 요즘 지도자들의, 그 진지함이란. 쳇! 남한테 존경받으려 애쓰지 않는 사람들과 놀고 싶다. 하지만 그런 좋은 사람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 자꾸만, 어긋난다. 인간은, 아니 남자는 '난 훌륭해.' '내겐 멋진 구석이 있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를 수용하기에는 그 당시 시대와 현실이 냉혹하고 위선적이었을까요.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게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그는 끝내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찾을 희망이 없었던 거지요.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저는 부끄러움에 죽을 것 같습니다.

제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절망의 외면적인 이유가 '신분'이라면 내면적인 사연은 '사랑'입니다. 나오지는 누이에게 남긴 편지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어느 화가의 부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녀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남편 때문에 부인을 단념합니다. 도덕 때문이 아니라 몰상식, 엉터리, 지저분한 그리고 미치광이나 다름없는 화가가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누이인 가즈코가 자신이 사랑하는 '우에하라'가 유부남임에도 적극적으로 나간 반면, 동생인 나오지는 유부녀 '스가짱'을 포기하고 맙니다. 생과 사가 여기에서 갈렸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니까요.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저는 그날 그때, 그 사람의 눈동자에 아픈 사랑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의 눈에는 어떤 사심이나 허식이 없었습니다. 고귀함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내 주변의 귀족 가운데 어머니를 제외하고 그렇게 경계심 없고 '정직'한 눈빛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심성에 이끌려, 아니 올바른 애정을 품은 사람이 마냥 그리워 부인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그 화가의 집에 놀러 가게 되었습니다.


(...) 부인을 단념하자고 마음먹고 가슴의 불길을 딴 데로 돌리려고 닥치는 대로, 여러 여자들과 미친 듯이 놀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인의 환상에서 벗어나 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실패. 저는 결국 한 여자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입니다. 저는 부인 이외의 다른 여자 친구를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누나. 죽기 전에 한 번만 쓸게요.....스가짱. 그 부인의 이름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현실 그리고 이룰 수 없는 사랑. 나오지의 절망이 이제 좀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 탓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자이 오사무 ㅡ 사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