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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pr 28. 2023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그다음을 쓸 수가 없었어요

다자이 오사무 / 사양

이제 다자이 오사무 <사양>의 화자이자 주인공 '가즈코'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가즈코는 다자이 오사무의 연인 '오타 시즈코'라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일기와 편지의 일부가 이 작품에 반영되기도 했습니다.


가즈코는 가족 중에서 가장 의지가 투철하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인물로 그려집니다. 어머니와 남동생 나오지의 죽음을 차례로 지켜보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놀라운 의지를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사랑을 자신의 방식으로 쟁취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혁명을 동경한 적도 없고 사랑조차 알지 못했다. (...)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그대로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애정 없는 결혼, 실패 그리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느껴야 했던 쓸쓸함. 남동생의 끊임없는 일탈까지. 자칫 지칠 만도 한데 그녀는 나오지처럼 절망 속에서 헤매지 않고 꿋꿋이 각박한 현실을 극복해 나갑니다. 한 번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위해선 낡은 도덕마저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각오를 다지지요.


"전투, 개시.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싸워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새로운 윤리, 아니, 그런 표현은 위선적이다. 사랑. 그것뿐이다. '사랑'이라고 쓰고 나니, 그다음을 쓸 수가 없었다."


남동생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작가 '우에하라'를 사랑하게 되고, 긴 편지를 보내 먼저 사랑을 고백하는 적극성도 드러냅니다. 그가 유부남임을 알고 있음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 시대를 지배했던 도덕관념을 아예 무시해 버리기까지 하니까요. 어떤 면에서는 암울한 시대의 흐름에 위축되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주체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즈코가 강인한 면만 보여준 건 아닙니다. 가세가 기울어 귀족들이 살던 도쿄의 집을 버리고 삼촌의 도움으로 시골인 이즈의 산장으로 쫓기듯이 이사를 가지만, 어머니를 위로하고 끝까지 돌봅니다. 동생 나오지마저 대학에 다니다가 징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간 후 연락이 끊기지만,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도 애틋합니다. 점점 병이 중해지는 어머니를 보살피며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까지 떠맡게 되었지만 비참한 상황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즈코는 가문의 몰락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어머니와 절망에 빠져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오지를 끌어 앉습니다. 자신보다 나약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애쓰는 것, 어쩌면 그녀가 말한 진정한 혁명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아, 동생도 괴롭겠지. 게다가 앞길이 가로막혀서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아직 전혀 모르고 있는 거겠지. 그저 매일, 안간힘을 쓰며 술을 마시고 있는 거겠지. '불량하지 않은 인간이 있을까?'라고 그 공책에 쓰여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불량, 삼촌도 불량, 어머니조차 불량하게 여겨진다. 불량하다는 건 상냥하다는 뜻이 아닐까."


"아아, 이 사람들은 뭔가 잘못된 거야. 하지만 이 사람들도 내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떡해서든 끝까지 살아야만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까지 살기 위한 이런 모습도 미워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산다는 것. 산다는 것. 아아, 그것은 얼마나 숨 막히게 버거운 일인가."




제가 가즈코에게 인상 깊었던 점은 사랑을 위해 어떤 부끄러움도 이겨내는 '용기'였습니다. 그녀는 우에하라에게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당당히 밝히면서 만날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수통 보내지만 그가 별 반응이 없자, 아예 우에하라가 사는 집을 수소문해 찾아가고, 천신만고 끝에 우에하라를 만납니다.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녀는 우에하라의 아이를 갖습니다.


"저는 상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낳고 싶지 않습니다. 체호프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이를 낳아 주시오, 우리의 아이를 낳아 주시오.'라고 썼지요. 니체의 에세이에도 '아이를 낳게 하고 싶은 여자'라는 표현이 있었어요. 저는 아이를 갖고 싶어요. 행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돈도 필요하지만 아이를 키울 수 있을 만큼의 돈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도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구요. 아내가 있는 남자에게 이런 요구를 하다니요. 그녀는 말합니다. '가로막는 도덕을, 밀쳐 낼 수 없나요?' 저도 처음에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가 소설을 읽어가면서 세상 기준으로 그녀를 재단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도덕적이지 못한 '여자'가 아니라 도덕을 초월하고자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면 안 되는 건가요?


그래도 그건 불륜이 아니냐고 탓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행동은 자신의 욕정이나 욕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이 믿고 추구했던 사랑과 혁명을 위해서,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 남자에게만 구애한 것이었으니 달리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해주고 싶네요. 물론 둘 사이에 구분은 쉽지 않고 굳이 구분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가 필요했던 것이니까요. 그게 그녀가 믿는 사랑의 완성이자 혁명이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당신이 저를 잊는다 해도, 또한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다 해도, 저는 제 혁명의 완성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선해(善解)하면 사랑하는 당신과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함께 살 수 없으니, 당신의 아이라도 낳아 그 아이를 통해 당신을 느끼며 살아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집니다. 사랑의 결과물인 아이를 보며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으로 아이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도덕적인 잣대로만 비난할 수 있을까요. 간음하다가 잡힌 마리아를 정죄했던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위선을 지적한 예수처럼, 그녀를 탓할 만큼 우리는 정말 도덕적인가요? 사랑의 감정은 때로 인간의 도덕과 상식을 초월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불량한 사람이 좋아요. 더구나 딱지 붙은 불량이 좋아요. 그리고 저도 딱지 붙은 불량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달리 제가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은 일본 제일의 딱지 붙은 불량이겠죠. 그리고 최근 다시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추접스럽다, 역겹다며 몹시 미워하고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동생한테서 듣고, 더욱더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칭찬은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평생 잊어버리지 않죠. 기억해 두면 즐겁잖아요."




그녀가 보여준 삶의 자세와 행동을 통해 거대한 담론과 '정치적 올바름(PC·political correctness)’ 논란이 횡횡하는 요즘, 과연 무엇이 진정한 혁명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 신념과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두요.


그 시대의 페미니스트 다자이 오사무에게 묻고 싶어지네요. 가즈코가 말한 사랑과 혁명이 제가 생각하는 이게 맞느냐고.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자신의 사랑을 담아 보낸 편지가 눈에 생생합니다. '만일 내가 그 편지를 받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답장은 결국 제 몫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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