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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May 01. 2023

잊으셨다면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다자이 오사무 / 사양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고, 가즈코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글을 써서 그런지 그만 정이 들고 말았습니다. 가즈코를 글 한편으로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다자이 오사무가 다시 살아나 그 이후의 이야기를 써 주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건 무용한 짓이겠지요. 끊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소설에는 화자로서 상황을 설명해 나가는 가즈코가 있는 반면,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작가 우에하라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들은 다자이 오사무를 사랑했던 오타 시즈코의 편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도 글솜씨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편지에 다자이 오사무를 향한 진정(眞精)이 담겨 있어서 그렇겠지요. 그 시절에는 편지 외에 달리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할 방법이 없었으니, 더 정성을 들여 썼을 겁니다. 편지는 그 사람을 향한 내 진심입니다. 그래서 어떤 편지든, 내용이 어떻든지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정을 담은 글을 써서 보낸다는 것,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요? 쉽게 내뱉는 말과 달리 글에 내 감정을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내 감정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감정을 글로 정확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진실해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문득 대학 시절, 학보에 편지를 끼어서 보냈던 기억이 나네요. 이런 게 그리워지는 걸 보니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편지를 더 이상 쓰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가즈코는 우에하라에게 한 통의 편지만 보낸 게 아닙니다. 여러 통입니다. 그러나 답장은 끝내 받지 못합니다. 얼마나 야속했을까요? 그를 사랑한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히 다 털어놓았는데,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자라면 다소 수치스러운 이야기까지도 꺼냈는데요. 그녀는 편지에서 말합니다.



"만약 이런 편지를 조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가 살아가는 노력을 조소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목숨을 조소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숨이 턱턱 막히는 퀴퀴한 항구의 공기를 참을 수 없어, 항구 바깥에 태풍이 몰아친다 해도 돛을 올리고 싶습니다. 쉬고 있는 돛은 더럽기 마련이죠. 저를 조소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쉬고 있는 돛입니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솔직한 감정을 조소하는 사람이라면 사실은 자신도 그러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척하는 이중인격자이거나 감정이 메말라 버린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절박한 문장 앞에서 가즈코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저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가즈코는 의지의 여인이었지만 감수성이 동생 나오지만큼이나 풍부했습니다. 이 글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아무래도 이젠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초조감. 이런 게 바로 불안이라는 감정일까? 가슴에 고통스러운 파도가 몰아쳐 마치 소나기가 그친 하늘에 허둥지둥 흰 구름이 잇달아 황급히 몰려왔다 지나가는 것처럼 내 심장을 옥죄었다 풀었다 하고, 맥박과 호흡이 흔들리면서 눈앞이 가물가물 어두워졌다. 온몸의 힘이 손가락 끝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에, 더 이상 뜨개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현실에 대한 불안한 심정,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초초함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문장은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은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지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장에 달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다는 것, 인간만의 특권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작가들의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깊은 충격과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어머니, 전 요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전혀 다른 점이 뭘까요? 언어도 지혜도 생각도 사회 질서도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신앙도 있을지 몰라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지만, 다른 동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도 없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머니, 딱 한 가지 있어요. 다른 생물에게는 절대로 없고 인간에게만 있는 것. 그건 바로 '비밀'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제 다자이 오사무도 없고, 가즈코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가 자신의 분신인 가즈코를 통해 했던 말은 글이 되어 지금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비밀'이 담긴 글 말입니다. 인간의 힘은 바로 이것이라고 믿습니다.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보낸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지를 여기에 다 소개할 수는 없는 것이 아쉽네요. 메마르고 혼탁한 시절, 이 편지를 읽고 잠시 가즈코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당신도 당신만의 비밀을 만들어 보는 건요.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은 좋은 일일 겁니다.




"편지를 쓸까 말까, 무척 망설였습니다. 나오지의 누나예요. 잊으셨나요? 잊으셨다면 기억을 되살려 보세요.


6년 전 어느 날 제 가슴에 아스라이 무지개가 걸렸고 그건 연애도 사랑도 아니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 무지개 빛깔은 점점 또렷해져 저는 지금껏 한 번도 그걸 놓친 적이 없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간 맑은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이윽고 덧없이 사라져 버리지만, 사람의 가슴에 걸린 무지개는 사라지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분은 정말로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그야말로 비 갠 하늘의 무지개처럼 생각하신 걸까요? 그리고 까마득히 사라져 버렸노라고?


그렇다면 저도 저의 무지개를 지워 버려야만 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명을 먼저 지우지 않으면, 제 가슴의 무지개는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와중에, 이런 상태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환자나 다름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할 뿐입니다. 동생은 아시다시피 마음의 병을 앓는 중환자라 (...) 하지만 괴로운 건 이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생명이 이런 일상생활 속에서 마치 파초 잎사귀가 떨어지지 않고 썩어가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절로 썩어 가는 제 미래가 눈에 선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의 양쪽 입가에 생긴 희미한 주름을 보세요. 오래된 슬픈 주름을 보세요. 저의 어떤 말보다도 제 얼굴이 제 가슴속 그리움을 당신에게 분명히 알려 줄 것입니다. 제 가슴속 무지개는 불꽃의 다리입니다.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갈 만큼 그립습니다. 제 가슴속 불꽃은 당신이 불 붙인 것이니, 당신이 끄고 가세요. 저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끌 수가 없습니다.  



아시겠어요? 사랑에는 이유는 없습니다. 기다림. 아아, 인간의 생활에는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여러 가지 감정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인간 생활에서 겨우 1퍼센트를 차지할 뿐인 감정이고 나머지 99퍼센트는 그저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행복의 발소리가 복도에 들리기를 이제나저제나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기다리다, 텅 빈 공허감. 아아, 인간의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겠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이 현실. 그리고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헛되이 뭔가를 기다려요. 너무 비참해요. 태어나길 잘했다고, 아아, 목숨을, 인간을, 세상을 기꺼워해보고 싶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ㅡ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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