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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n 02. 2023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가는 봄

이은규 / 다정한 호칭

반복되는 일상, 지루하다. 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 순간 봄을 잊었다. 자극이 필요하다. 한 편의 시를 읽는다. 생각하지 못한, 미처 보지 못했던 시선이 느껴진다.




고장 난 오르골

화음을 잃어버린 거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태엽에 남은 겨울을 감으면 문득, 봄


긴 기다림일수록 빨리 풀리는 바람의 태엽

입김을 동력 삼아 한 꽃이 허공을 새어나온다

찢겨진 것들의 화음으로 소란한 봄

꽃은 피는 것이 아니다,

찢겨진 허공에서 새어나오는 것일 뿐


열어놓은 오르골을 닫지 못하는 날이 길다

막 찢겨져나온 꽃의 그늘을 디디면

차라리 지독한 근시를 앓고 싶어, 앓고 싶지 않아

피 냄새로만 붉어지는 향기의 구멍


바람이 거두어간 화음을 바라본다

꽃이 눕는 자리에 내가 누우면 어느 도착이 있을까

혼자 볼 수 없는 꽃이 너무 가깝듯

때로 어떤 이름은 잊어버리는 것으로 잃어버려야 하는 것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가는 봄


혼자 보는 꽃에 눈이 멀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나는 장님이 되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남은 눈동자처럼

고독하다


바람이 이 문장을 데려다주면, 데려가줬으면

때를 놓친 오르골 소리는 이미 바람이고

서성이는 꽃의 향기도 돌려보내야 하는 때


저 바람에게서 누군가의 연착을 예감한다

풀리려는 힘으로 감기는 바람의 태엽이라 해도

화음을 잊은 오르골은 소용이 없거든

봄은 잠시만 있거든


<이은규 ㅡ 별무소용( 別無所用)>




한 달을 돌아본다. 별무소용(別無所用)이다. 이름을 잊는다는 것은 그를 지워버리는 것, 잊어버리는 것으로 상실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었으면.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잃어버리는 것이 나을까. 문장 주변을 한참 서성인다.


나도 잠시만 있거든, 봄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 너를 잊어버려 너를 잃고 말았구나.


무심한 건 세월만이 아니다. 아무 말도 없는 너의 무심함에 나는 더 통증을 느낀다. 보이지 않으니 무심함이 더 철저했다. 참고 있다고, 글쎄... 한 세월이 또 흘러가고 있는데도. 무의미한 말일뿐.


아직 도착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가는 봄이라니. 봄도 나의 무심함에 정나미가 떨어졌을까. 2024년에도 봄이 다시 찾아올까. 기대할 수 없다. 밤이 지나 봐야 알 것 같다. 그러나 밤은 길었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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