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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06. 2023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얼마 전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사법연수원 동기를 우연히 만났다. 직역이 달라서 그랬는지 오랜 기간 서로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다.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느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무심히 지나간 세월만큼 나도 그에게 무심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의 간격 때문인지 대화는 겉돌았고 화제는 자주 어긋났다.


그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살면서 연락이 끊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떠올리며, 나는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자조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놓쳐버린 인연들에 대해,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에 대해, 그들 없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의 한 구절이다. 오래전에 헤어진, 연락처마저 지워진 사람 ㅡ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ㅡ 을 우연히 만나는 건, 현실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혹시라도 우연히 만나게 되면 과연 서로를 알아볼까. 당황스럽거나 또는 어색해서 피하지는 않을까. 그러곤 후회하지 않을까...


우선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 잊고 살았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고, 지난 시절 함께 했던 일들을 풀어놓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만약 그가 친구였다면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낼 터이니 좋은 일이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한 시절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어떨까? 서로에게서 그 시절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나 할까? 여전히 지난 시절의 그 사람으로 기억할 텐데, 그간의 세월의 간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러 생각이 들 것만 같다.


서로 안 좋게 헤어졌다면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이제 와서 오해였다고 해명한들 오해가 풀릴 일도 만무하고. 한 번 봤다고 계속 연락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모른 채 하기도 그렇고. 연락하고 싶은 마음과 연락하지 말아야 하는 당위 속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고민이 깊어지면 그때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다시 서로 외면하고 살 거라면, ㅡ 최진영의 <구의 증명>에 나오는 이 문장처럼 ㅡ 지금까지 쭉 그래왔듯이 모르고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하게 될 수도 있다.



‘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피천득 선생의 <인연>의 주인공 아사코. 선생과 아사코와의 만남을 봐도 그렇다. 선생이 내린 결론은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였다. '오랜만에 만나면 좋은 거 아닌가?' 아주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이 수필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이 지금은 '맞아. 그럴 수도 있겠다.'로 바뀌면서 나는 피천득 선생의 고백이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되었다.


상황을 감내하기 어려우면 선생의 말처럼 만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할 때 아름다운 것이지, 지금으로 직접 불러내는 것은 무용한 짓이다. 새롭게 뭘 시작할 수도 없으니 잊고 지낼 때보다 더 힘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녔던 감정은 흐르는 시간과도 같아서, 돌이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되돌아간다 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임을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인연을 만났어도 몰라봤고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말았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내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인연>의 마지막 문장 ㅡ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ㅡ 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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