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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Jul 18. 2023

우리를 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주말처럼 시간이 많으면 자꾸 딴생각, 주로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그때 왜 그랬지? 그러지 말걸…' 후회스러운 일들이 대부분이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중 단편 <이모>를 읽다가 이 문장이 눈에 띈 건 그런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자기 앞의 몇 년의 시간이 안개 낀 평원처럼 드넓게 펼쳐져 있다는 걸 실감한 뒤부터 그녀는 오로지 과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고, 어느덧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자기만의 시간을 갖겠다고 홀연히 사라진 여인, 그녀가 짊어져야 할 짐은 자신의 짐 외에 다른 사람들의 짐 때문에 더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지만 인정상 그럴 수는 없고,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의 인생이 꼭 불쌍하다는 건 아니다. 누구나 짊어져야 할 인생의 무게가 있고, 그 짐은 대부분 경중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별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녀가 짊어져야 할 짐이었을 뿐이다.


돈이 많다고, 남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남다르게 건강하다고 그 짐이 가벼운 것도 아니다. 외관상 보이는 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는 비교적 엇비슷하다는 뜻이다.


돈이 없어도 가진 것을 족한 줄 알고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재벌처럼 돈이 많아도 늘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도 있다. 돈이 없으니 행동에 제약을 받겠지만 마음은 가벼울 것이다. 돈이 많지만 고민이 많으니 마음은 무거울 테고. 두 무게를 대충 비교하면 비슷해진다는 것, 그러니 나만 힘들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결국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죽는다. 죽기 전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그녀가 한 일은 생활비는 최소한도로 쓰고,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글쎄,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으면 그동안 다니지 못했던 해외여행도 가고, 재밌는 일을 찾아서 하루하루를 흥미진진하게 채워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철저히 고립된 생활을 자초했다.


좀 별론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누군가의 삶을 평가할 수 없다. 나도 한때는 세상에 길들여진 나만의 잣대로 세상과 사람들을 평가했다.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해 내가 얼마나 안다고, 무엇보다 내가 누구라고 다른 사람의 삶을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섣부른 판단과 그에 따른 조언은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건 내 몫이 아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삶이 아닌 찌질한 가족들을 위해서 살았던 지난날과 인생 말년을 고독하게 보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찾았던 인생의 재미를 누리지 못했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나는 단정할 수 없었다. 오히려 묵묵히 자신이 짊어져야만 했던 인생의 짐을 묵묵히 감당함으로써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품격을 드러냈다.


신형철 평론가는 말한다. "인간은 고통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당해 내기도 한다. 그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인생의 비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의 숭고함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녀는 지난날 자신을 억눌렀던 고통을 잘 견뎌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렇게 토로한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욕망과 기대가 있으면 고민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얻지 못해 고민하고 얻기 위해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번뇌와 갈등 또한 거기에서 유래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도 다를 바 없다. 그런 감정들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이 여름의 무더위는 점점 더 심해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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