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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2. 2023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걷는 것이 삶의 익숙한 패턴이 되었지만, 요즘처럼 더운 여름에는 걷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난다. 그 순간 그만 걸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럼에도 그때마다 버틸 수 있었던 건, '꼭 저기까지 가야지. 다른 사람을 따라 잡아야지. 오늘도 목표를 꼭 채워야지', 이런 유의 어설픈 목표의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소한 불편에 무력해지는 나를 무너뜨리고 싶은,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은 의지였다. 내가 나한테 쓰는 쓸데없는 힘을 빼고 싶은 각오였다.  


이제는 고인이 된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주인공이 전 배우자와 나눈 대화를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체스는 그렇게 잘 두면서, 왜 인생에서 싸울 줄은 몰라요?" 플로렌스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했다.  


"인생에서 싸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 자신과 싸울 일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주인공은 퇴근 후 늘 체스를 둔다. 그것도 혼자서, 스스로 상대를 바꿔가면서 두는 체스. 그는 마치 상대가 있다는 듯, 이런저런 말을 한다. 체스를 둘지 모르는 나는 동명 소설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러면 재밌을까? 얼마나 적적하면 게임을 하면서 혼잣말을 할까?' 고독이 습관이 된 모습이었다.


이제는 배우자와 이혼하고 혼자 쓸쓸히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사람은 외로운 존재구나, 처음에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회상하는 저 대화를 통해 체스마저도 자기 자신과 싸우고 견디는 도구로 사용했던 그의 철저한 자기 성찰의 모습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진정한 경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굳이 싸우려면 '과거의 나'와 싸워야 한다는 것. 모든 경쟁이 그렇듯, 이길지 질지는 전적으로 나한테 달렸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자기랑 싸우라고? 그건 좀 아니지 않나?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가장 부작용이 적은 경쟁 방법이고 승패와 관계없이 나를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수단인 것도 분명하다. 내가 더워도 굳이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 무척 더웠지만 달이 아주 멋지게 둥글었다. 달빛으로 모든 것이 채워질 것만 같은 밤이었다. 만월(滿月)!! 인간이 만든 모든 빛들은 그 앞에서 완연히 빛을 잃었다. 도도하고 당당한 모습, 어디를 가도 뒤쫓아오는 달은 밤의 주인공이었다. 저 달을 표현할 적확한 말이 무엇일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꽉 찼다는 말 외에는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휴대폰으로 달의 모습을 찍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순간의 촬영으로 내가 보았던 풍경을 저장한다는 것, 간편할 것 같았다. 나처럼 달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말도 필요 없을 테니까. 때로 사진보다 말이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마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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