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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Nov 03. 2023

흘러내리는 동안 눈물은 상처를 달랜다

지난해 김연수 작가의 단편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읽은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글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썼는지, 문장이며 스토리까지 막힘이 없었다. 그 책에 수록된 상처 입은 연인의 회복을 담은 단편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가 대표적이다.  


작가도 실연의 상처나 아픔을 경험했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는 구체적이고 탄탄했다. 이별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사찰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는 ‘예정’, 그녀에게는 혼외 관계로 낳은 죽은 아이가 있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무척 힘들게 했다.  


'... 자기 꼴에 풀색 치마 연분홍 저고리가 가당키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자신이 진달래보다도 환하고 왕머루 덩굴진 잎사귀보다도 더 푸릇푸릇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게 왜 그리도 가슴을 아프게 하는지 예정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어서 나이가 들었으면 좋으련만, 어서어서 머리가 새하얗게 세어버리고 살갗도 물기가 말라버려서 누구나 자신을 늙은이로만 봐줬으면 좋으련만, 그런 바람뿐이었다.' (211p)


사찰에서 공양주 보살로 봉사하는 어느 나이 많은 여인이 예정의 가슴 아픈 상처를 이해하고 이렇게 위로한다.  


"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그 말에 예정의 눈썹으로 눈물이 맺혀 들었다. (...) 나는 살아생전 셀 수도 없이 많은 바다짐승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이야. 손에서 피비린내가 떠날 날이 없었단다. 그런 나도 이렇게 한평생 잘 살아오지 않았겠냐?


이제 그만 잊거라.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예정은 그저 하염없이 배냇저고리만을 바라볼 뿐, 눈물을 닦지도 훌쩍거리지도 않았다.


"함부로 울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잘 보내도록 해라." 예정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공양주 보살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은 마음에서 솟구쳐 눈에서 나와 빰을 타고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동안 눈물은 상처를 달랜다. 그래서 눈물은 그렇게 쉽게 마르는 법이다. (219 - 220p)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어떤 경험과 노력이 필요할까. 어떻게 해야 글을 유려하게 쓸 수 있을까. 몇 편의 단편이 나에게 준 자극이 작지 않았다. 그동안 브런치에 쓴 내 글들이 무색해졌다.


쓸 말이 없어도 어떻게든 우격다짐으로 썼던 지난 시간들이 스쳐갔다. 나도 지금까지 쓴 글을 통해 예정처럼 내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려고 했을까. 그렇다면 내 상처는 아물었을까.


나는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매번 지나치게 교훈적인 글을 남겼다. 작가는 사실을 토대로 교훈을 암시하고 때로 어떤 가르침도 거부한다. 하긴, 다른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교훈은 이미 충분한 것이다.


사실만을 언급할 뿐인데도 읽다 보면 '아, 이런 거구나' 하면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을 때가 많았다. 작가는 나처럼 직설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을 언급하지만 그 행간에서 삶의 지혜와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었으면.


글을 쓰면서 나만의 글 쓰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한다.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자극을 받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포함해서. 그게 쌓이면 나도 자신 있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러나 너무 어렵다.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한다. 많은 기대를 하지 말고 편하게 쓰자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책을 읽고 뭔가를 쓰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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