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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Nov 02. 2023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흐린 날이라서 그런지 문득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주인공도 오늘처럼 짙은 안개로 잔뜩 흐린 '무진'을 향해 가고 있었지. 아마. 그곳에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누구를 만날지 모르면서. 마치 우리 삶처럼.


그리고 무진을 떠나면서 그곳에서 사랑에 빠진 여인(하 선생)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의 문장이 이랬다. 우리 소설 중에서 가장 애틋하면서도 심플한 사랑 고백으로 기억하고 있다.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데 헤어져야 하다니, 현실과 이상의 간격이 너무 컸을까. 아니면 그의 사랑이 존재하는 무진이라는 공간을 떠나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을까. 사랑하고 있다면서 그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주인공.


사랑하는 하 선생을 뒤로 한 채 무진을 떠나야만 했던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상상한 적이 있었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나이를 지나 세속의 이치에 물든 지금에 와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하지만 정작 내가 생각해 봐야 했던 것은 갑자기 그를 떠나보내고 남은 하 선생이었다. 왜 이제야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떠올리게 된 것일까. '차라리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나 말 것을, 자신을 그가 사는 서울로 데리고 간다고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선...' 그 편지를 읽었을 그녀의 심정이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그녀의 상실감은 그저 상상으로만 남았다.


나의 '무진'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무진에 간 적이 있었을까. 간 적이 있다면 그곳에서 나의 하 선생을 만났을까.... 질문은 많으나 답은 궁색하고 잘 찾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주인공처럼 다시 만날 기약 없이 떠난 후 아직까지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어제 날씨처럼 칠흑 같은 안갯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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