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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Aug 14. 2021

오해와 이해

레마르크/개선문

삶은 끊임없는 오해의 연속이다. 오해하고 또 오해하고. 그러다 처음 오해했던 것마저도 잊어버리는. 체념은 그런 상황에 지친 우리의 마지막 상태가 아닐는지. 오늘 들었던 생각이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게 다르고, 각자의 경험과 입장이 다르고, 그러다 보면 오해가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럴 때는 그냥 인정해 주는 게 낫다.


'오해'와 '이해' 한 글자 차이지만 결과는 판이하다. 오해하면 멀어지고 이해하면 가까워진다.





조앙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당신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네요.” 


“대체 누가 이해를 하고 싶겠어? 바로 거기서 세상 모든 오해가 생겨나는데...”

라비크의 대답이었다. 


<레마르크 _ 개선문>





주인공 라비크와 조앙은 연인이었다. 전쟁 상황, 나치가 지배하는 독일에서 유명한 외과의사였던 라비크는 나치에 쫓겨 프랑스 파리에서 몰래 대리 수술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다가 조앙을 만난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랑, 서로를 사랑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아마 조앙도 답답했으리라.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라비크가. 라비크 또한 마찬가지였을 테고.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금세 거리가 생기는 게 남녀 사이가 아니던가. 그걸 극복하는 건, 서로에 대한 믿음과 변함없는 사랑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지, 내 희망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흔들릴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마는.


사랑은 끝없는 이해를 요구한다. 어느 순간, 그 이해하려는 마음을 버릴 때 사랑은 끝나고 만다. 그래서 사랑은 시작도 어렵지만 지키는 건 훨씬 더 어렵다.






김소연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요즘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가급적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점이다. 세월이 지나야 조금이라도 바뀌는 게 있긴 하나 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한계려니 생각하고,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뜻이 있을 거라 믿고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믿음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미리 믿는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그때까지 견딜 수 있는지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을 힘들어한다. 내가 그랬다. 이젠 안 그러려고 노력해 보지만 여전히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도 역시 믿음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일단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좋을 것 같다. 전체를 보지 않고 일부만 보고, 비난하거나 오해하는 건 그 사람과 그의 행동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밤공기가 한결 시원해졌다. 습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땀이 덜 난다. 여름도 이렇게 가나 보다. 시선을 바꾸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법.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딱히 방법이 없기도 하고. 그건 무력하게 끌려가는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늦은 산책을 하면서 들었던 곡. 피아노 전주가 좋았다. 노래도 좋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Alternative Rock이기도 하고. 음악만큼 아무 대가 없이, 별다른 고려 없이 위안을 주는 게 있을까. 그래서 나는 힘들 때 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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