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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Nov 21. 2023

너무 그리워 가슴에 사무친

다니자키 준이치로 ㅡ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소장이라고 하니 군인인가 하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관직 명이다. 피상적으로 읽으면 다분히 통속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만>과 비슷하다. 하지만 문장의 유려함과 아름다움은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


본의 아니게 늙은 아버지를 떠나 다른 남자와 사는 젊은 어머니, 그리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게모토.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지만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어머니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벅찬 상황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표현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역시 다니자키가 무엇을 말하려고 이 소설을 썼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막연히 모성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시절에도 불륜과 여성편력이 심한 남성들의 호기로운 삶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인간 특히 남성의 본능과 욕망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계급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배우자마저도 계급이 높은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는 남성들의 비참한 심정을 그리고 싶었을까.


후반으로 갈수록 시게모토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의 경험(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일찍 죽었다)을 소설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짙어졌다. 그는 말한다.


"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 내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막연한 '미지의 여성'에 대한 동경 ㅡ 소년기의 사랑의 싹틈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과거에 어머니였던 사람과 장래 아내가 될 사람은 똑같이 '미지의 여성'이며, 나와 눈에 안 보이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에선 기구한 인생을 살았던 어머니에 대한 묘사는 인물의 외면적인 것에 그칠 뿐 내면은 생략되어 있다. 한 남편의 아내이자 어린 아들의 어머니로서 사랑하는 아들을 떼놓고 다른 사람의 아내로 가야 했던 그녀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그저 상상에 맡길 뿐이다.


그 남편 또한 일찍 죽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성인이 되자 그녀는 출가해서 비구니가 된다. 그녀 역시 내면에서 많은 고통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주인공의 그리움은 뒷부분에 나오고 소설의 중반까지는 두 고위직 관료의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등장한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당시 남성들을 보면서 지금이나 그때나 방식만 다를 뿐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자키는 당시 시대상에 빗대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묘사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모순적인 면과 위선을 드러내었던 것이 아닐까. 그처럼 인간의 욕망과 욕정을 통해 인간이 지닌 모순과 위선을 드러낸 작가도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에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부분, 이제는 불가(佛家)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어머니를 시게모토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어머니를 발견한 시게모토.


"어머니!" 시세모토는 다시 한번 불렀다. 그는 맨땅 위에 꿇어앉아, 아래에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그녀의 무릎에 온몸을 내맡기듯 기댔다. 하얀 모자 속에 파묻힌 어머니의 얼굴은, 꽃무더기를 뚫고 내리비치는 달빛을 받아 뿌옇게 보였지만 여전히 귀엽고 자그마했으며 마치 원광(圓光)을 뒤에 달고 있는 듯했다.


40년 전의 어느 봄날, 휘장 그늘 속에서 그 품에 안겼을 적의 기억이 금세 영롱하게 되살아나고, 한순간에 시게모토는 예닐곱 살의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어머니 손에 들린 황매화 가지를 거칠게 젖혀내면서 자신의 얼굴을 어머니 얼굴 쪽으로 더욱더 디밀었다. 어머니의 검정 소매에 스민 향내가 문득 먼 옛날의 잔향(殘香)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마치 응석이라도 부르듯 어머니 소매에 얼굴을 문지르면서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장성한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던 어머니를 만난 시게모토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을 만났을 때 기분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상상은 할 수 있으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처럼 글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어머니는 몽환적인 어떤 이상향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이 아름다운 소설의 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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