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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Dec 13. 2023

꽃다운 시절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사라지고

<존 윌리암스 ㅡ 스토너>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는 몇몇 죽음이 등장한다. 주인공인 스토너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가 교수가 되는데 큰 도움을 준 아처 슬론 교수의 죽음 그리고 스토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소설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죽음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죽음 역시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아처 슬론 교수는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학 연구실 책상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검시관은 심장마비가 사인이라고 하지만 정확한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스토너는 생각한다. 그가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 자기 의지로 심장을 멈추게 했을 거라고. '세상에 뿌리부터 배신당해 더 이상 참고 살아갈 수 없게 된 그가 마지막 순간에 세상을 향해 사랑과 경멸을 드러낸 것 같다'는 해석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대학교수에 특별히 부족한 것이 없었던 삶인데도. 사람은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주변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오래전부터 스스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교수라는 명예도 학문적인 성취도 그를 죽음에서 건져주지 못했다.


그다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 가뜩이나 쇠약해진 몸으로 무리하게 농장 일을 도와주다가 현장에서 죽고, 홀로 남겨진 것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 역시 얼마 안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배우자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외로움이 그녀로 하여금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죽음인데도 작가는 무겁게 서술한다. 그것도 아주 건조한 필체로. 그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스토너가 아닌데도 스토너의 상실감이 느껴졌던 건 최근 내 주변에서 하나둘씩 들려오는 부고와 무관치 않다.




나이가 들면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피부는 쳐지고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해도 젊은 시절만큼의 기운을 얻을 수 없다. 하나둘 병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 때로 죽음의 고통이 엄습하기도 한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운명이다.


이 책을 다 읽을 무렵인 지난봄, 대학 동창의 부친상에 잠시 들렸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돌아가시는 노인이 많아서인지 장례식장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가까스로 구한 장례식장, 장례는 3일이지만 딱 하루만 문상이 가능했다.


나는 망인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덧 한 시대가 천천히 나에게서 멀어져 사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삶은 덧없다는 것과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는 사실까지도.


스토너는 말한다. 슬론 교수의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었다고. 꼭 내 심정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망자의 죽음은 잊히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죽음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게 우리의 실상이다.


12월 13일, 2023년도 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내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초상>을 쓴 작가 이문열의 말이다.


"흔히 나이가 그 기준이 되긴 하지만,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가리켜 특히 그걸 꽃다운 시절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항상 그러하듯, 꽃답다는 것은 한 번 그늘지고 시들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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