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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영수 Dec 15. 2023

모든 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니콜 크라우스 ㅡ 위대한 집>

봄에 읽었던 니콜 크라우스의 소설 <위대한 집>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를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오해한 남자는 아내를 시험하기 위해 출장을 핑계로 잠시 아내를 떠납니다.


낯선 곳에서 아내 없이 보내는 하루, 늦은 시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합니다. 그러나 아내 생각에 그는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아마 지금도 낯선 그 남자를 만나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좀 길지만 그가 회상하는 아내와 아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나오는 부분을 인용합니다.




"한 여인,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 늘 옮겨 다니는 그 중심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에 대한 좌절감과 피곤함, 그리고 절망이 몰려왔다. 기름진 음식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이 흐르기만 기다렸다. 눈물이 좀 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알 수 없는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로는 너무 피곤하고, 지고 있는 짐이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고, 나는 몇 시간이고 그 자리에 앉아 지칠 줄 모르고 유리창을 때리는 빗물을 바라보며, 우리가, 아내와 내가 함께 지낸 날들을 생각했다.


그런 날들엔 모든 것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자기 전 벽에 붙여 세워둔 의자는 다음날 아침에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전날 이야기했던 작은 습관들은 다음날에도 그대로 예상할 수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환상일 뿐이었다. 단단한 물질이라는 것이 환상이고, 우리의 몸이라는 것이 환상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덩어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건 수백억 개의 원자들이 오가는 과정, 어떤 것은 새로 도착하고 어떤 것은 영원히 떠나가 버리는 과정이었다.


마치 우리 각자가 커다란 기차역에 불과한 것만 같았다. 아니, 기차역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가는 와중에 적어도 선로와 그 아래의 자갈, 유리 천장은 그대로 자리를 지킨다. 인간은 그보다도 못한 무엇, 매일 서커스 공연장이 세워졌다 다시 허물어지는 공터와 비슷했다.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모든 것이 바뀌고, 똑같은 공연은 한 번도 없는 그런 곳. 상황이 그 지경인데,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도 제대로 이해해 보겠다는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138 - 139p)




영원을 꿈꾸지만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존재,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변하고, 나는 그대로인 것 같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다른 사람들, 심지어 함께 살고 있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배우자마저도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삶은 덧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요? 어차피 모든 것은 지나가고 잊히고 마는데, 지금 붙잡고 매달린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늦은 밤, 주변은 밤에 묻혀 적막하고 음악만이 공간을 채웁니다.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맙니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늘 함께 살았던 아내를 떠난 남편, 그는 지금 아내를 의심하면서 힘들어합니다. 믿었는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치가 떨리기도 했을 겁니다. 그는 아내를 통해 지난 시절의 자신을 돌아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았던 순간들, 그러나 잠시였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건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즉, 나 때문입니다. 사실 상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입니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시선, 상대를 바라보는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상대를 탓하기 전에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 이것부터 물어야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긴장감과 설렘이 어느 순간 익숙함과 편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긴장할 때 조심했던 언행이 이젠 편하게 나옵니다. 별게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고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합니다. 점점 갈등은 깊어지고 같이 있고 싶은 마음마저 사라졌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아물기도 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도 남습니다. 그 상처들이 점점 쌓여 딱지가 앉았고 새로 돋아난 살은 딱지에 쌓여 보이지 않습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시작한 건 바로 그 지점부터입니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겁니다.


처음과 똑같이 변함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긴 어렵습니다. 신분과 가문을 떠나 뜨겁게 사랑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같이 살았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변해가는,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직시할 때에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처음의 사랑이 연민으로, 호감이 이해로 바뀔 때 불완전했던 우리의 사랑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 넘어지고 맙니다. 안타까운 우리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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